Analysis(hu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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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생각이 요구되는 사실이 인간이 결정불가능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mathsf{PA}\) 의 서수 분석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명백하게 무한한 생각이 요구되지 않았고, 무한한 증명을 담을 무한한 용량의 웹페이지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한한 생각으로 \(\mathsf{PA}\) 에서 증명불가능했던 사실을 이해했다. 생각 과정이 유한했다면 그것은 \(\N\) 안의 어떤 수로 사상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한한 생각이 요구되는 사실이 인간에게 있어서 결정불가능한 사실인가? 그렇다고 가정하면 실질적 무한이나 실질적 유한은 존재들에 따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분명히 어떤 존재에게 있어서 도달할 수 없는 \(\epsilon_0\) 를 인간은 도달했고, 그것을 유한한 생각으로 다룬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그곳으로 도달하는 중간과정을 \(\dots\) 으로 표현하거나 그것의 결국을 알기 때문에 중간과정을 건너뛰기 때문이다. 그러나 \(\mathsf{PA}\) 의 입장에서는 그것의 천장을 알 수 없고, 그것의 결국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중간과정을 \(\dots\) 으로 표현할 수 없다. \(\mathsf{PA}\) 는 증명이론 정리 15.8에 의하여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천장인 \(\epsilon_0\) 로 올라가려 할 뿐이다. 그러나 \(\mathsf{PA}\) 는 증명이론 정리 12.5에 의하여 절대 이 천장 \(\epsilon_0\) 에 도착할 수 없다.
\(\mathsf{PA}\) 를 하나의 인간으로 생각하자. 인간 \(\mathsf{PA}\) 는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epsilon_0\) 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가 이 결론에 도달하려면 무한히 생각해야 하고, 무한한 증명 과정이 필요하고, 무한한 웹 페이지의 용량이 필요하다. 그에게 있어서 \(\epsilon_0\) 가 실질적인 무한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한 생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한 서수들의 존재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 공리로 그것들의 존재성을 그냥 정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한한 생각이란 도달불가능한, 증명불가능한 사실로의 절차를 뜻하고, 유한한 생각이란 도달가능한, 증명가능한, 이해가능한 사실들을 뜻한다.
진리✔
이해✔
인간이 수행하는 이해라는 과정을 수학적으로 표현하자. A 라는 사람이 B 라는 사람에게 "갈매기" 라고 말했다. B 는 그 말이 뜬금없어서 "네?" 라고 대답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A 는 B 가 이해못했다는 것을 이해하고 "적이 나타나면 '갈매기' 라고 한다는 규칙이 존재한다" 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B 는 "이해했다" 라고 대답했다. 이 과정을 보면 인간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연결시킬 수 없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이해시키는 과정은 인간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로 그 사실을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진리의 근원✔
그러나 이런 사실에 대한 이해는 지엽적 사실에 대한 이해이고, 곁가지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사실들을 최초로 참이라고 여기고 있는가? 인간이 참이라고 여기는 사실들은 인간이 개별적으로 참이라고 정한 것이다. 인간들이 참이라고 여기는 사실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참이라고 여기는 사실은 보편적이지 않다.
인간은 어떤 지식을 참되다고 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기준이나 존재를 가진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지혜일 수도 있고, 부모님일 수도 있고, 자신이 충성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신과 신이 내려준 종교적인 경전일 수도 있다. 이것이 가장 근원적인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부터 모든 지엽적인 믿음과 참이라고 여겨지는 사실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부터 인간이 타당하다고 여기는 추론 규칙들도 나온다.
인간이 새로운 사실을 마주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이 믿는 존재에 빗대어 그 사실이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한다. 이것을 관점에 따라 이해, 탐구, 연구, 기도, 물음, 고민, 증명, 학습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은 최초로 참이라고 여기는 존재와 타당한 이해 과정이라고 수긍하고 있는 그 이해로 새로운 사실들을 이해한다.
인간은 오직 정보만을 주고 받는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진리를 인식하는가?
침대에 누워있는 인간을 생각하자. 그런데 그는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순전히 감각에 의해서이다. 만약 감각이 달라진다면 인간은 다르게 인식했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는 침대에 누워있는데도, 자신에게 바다에 빠진 감각이 입력되면, 그는 바다에서 빠져 죽지 않으려고 수영해야 한다고 인식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먼저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정보 뿐이고,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것도 정보 뿐이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먹으라고 밥을 주지 않은가? 부모는 자식이 먹으라고 밥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자녀에게 눈이 없다면 자녀는 부모가 밥을 주는 장면을 볼 수 없다. 그러면 밥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자식이 먹으라고 밥을 주었다는 말을 하면 된다. 자녀에게 귀도 없다면 부모가 자녀에게 밥을 줄 수 있는가? 밥을 주기가 어려워졌다. 자녀가 밥을 받았다는 정보를 받기가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촉각을 사용하여 어찌어찌 소통할 수 있고, 정보를 줄 수 있다. 그렇다면 자녀가 촉각이나 통각도 느낄 수 없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어떻게 밥을 줄 수 있는가?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정보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오직 정보뿐이다. 선택은 정보를 받은 인간의 몫이다.
감각은 정보이다. 인간이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에서 말도 안되게 바다로 이동되었다는 감각이 입력된다고 해도 그 상황이 어떤 존재들에게는 평범한 상황이라는 정보가 주어지고, 그 정보를 믿을 수 있는 충분히 타당한 논증이 주어지면, 그는 지금부터 그러한 존재들과 다름없이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감각은 보편적으로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감각의 인식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여러 궤변을 논파해야 하는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의가 시작되므로 이야기가 쓸모없이 길어진다.
인간 체계✔
그 다음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감각을 기반으로 더 추상적인 사실들에 대한 참거짓을 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참거짓을 결정하는데에 필요한 최초의 진리와 그 진리에 빗대어 판정할 수 있는 기준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신학, 신에 대한 지식을 정립하려는 갈망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이란 단지 모든 것을 참되다거나 거짓되다고 결정해주는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만약 부모에게 의지하여 모든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려는 자의 신은 부모이고, 돈을 기준으로 모든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려는 자의 신은 돈이고, 물론 기독교인들의 신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될 것이다.
위에서는 \(\mathsf{PA}\) 의 무모순성이 강한 체계에서 증명되는 과정 자체를 추상화시켜서 인간도 생각해낼 수 없는 사실이 존재할 것이고, 그것이 인간 체계의 증명불가능하고 결정불가능한 사실일 것이라는 것을 추측함으로써 어떤 가정을 세웠고, 이에 따른 타당성 정립이나 실험과정 등을 수행했다. 이런 것들이 인간이 수용하고 정립하는 추론규칙이다. 이것이 인간 체계의 추론 규칙이다.
그러면 모든 인간 체계가 갖고 있는 진리와 추론 규칙을 종합해보자. 이것을 인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은 모든 인류 체계가 갖는 추론 규칙을 아무리 적용해도 도달할 수 없고 생각해낼 수 없는 사실들을 뜻한다. 이것이 무한한 생각이 요구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류 체계보다 강한 체계는 인류가 무한히 생각해도 도달할 수 없는 진리들을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이 \(\mathsf{PA}\) 가 도달할 수 없는 사실인 \(\epsilon_0\) 를 단지 무한 공리로 정의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 체계는 강한 체계에 의지한다✔
이제 무한한 추론 과정의 필요성을 불가능성, 또는 존재할 수 없음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mathsf{PA}\) 입장에서 자신의 무모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생각이 필요하다. 인간 체계에도 실질적으로 무한한 생각이 요구되는 사실들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완전 체계이고,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전지한 존재일 것이다. 이는 불완전성 정리에 위배된다.
진리인데도 인간 체계가 그것을 이해해낼 수 있는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 진리들이 존재한다. 이런 진리들은 인간이 실질적으로 무한히 생각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극한점에 존재하는 사실들이고, 따라서 인간보다 강한 체계로부터 참되다고 정해진 후 내려와야만 인간이 알 수 있는 사실들이다.
인간은 무생물인 수학 체계와는 다르게 절망과 고통과 눈물과 비극과 슬픔 속에서 구원을 바라며 자신이 생각해낼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실들, 가령 구원, 생명의 길, 살 수 있는 길 등을 자신보다 더 강한 체계에게 알려달라고 요구해왔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러한 강한 체계를 신으로 불러왔다.
지식의 원천✔
인간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관하여 조금 더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지엽적인 믿음: 옳다고 여기는 것✔
사전적으로 믿음은 "옳다고 여기다" 는 의미와 "의지하고, 맡기다" 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의지하고, 맡기다" 의 믿음은 "옳다고 여기다" 라는 의미의 믿음으로 환원된다.
가령, 한국 브라질 축구 경기가 있을 때 "한국팀을 믿자" 라고 말한다. 이 믿음은 "옳다고 여기다" 의 의미와는 관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믿음이 성립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에 "나 대신 축구 경기를 이겨줄 것이다" 라는 기대가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기대는 믿음의 대상의 말을 근거로 한다. 즉, 이러한 믿음은 한국팀이 한 말 "우리가 브라질 팀을 이겨주겠다" 를 근거한다. 굳이 기계적으로 한국팀이 이 말과 정확하게 똑같은 말을 하지 않았어도, 한국팀의 존재 목적과 행동들로부터 보여지는 속성이 본질적으로 이 말과 같다. 그러면 이 말은 다시 객관적인 문장 "한국팀이 브라질을 이긴다" 가 된다. 그러면 이 믿음은 이 문장이 옳다고 믿는 믿음으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는 우리팀을 믿어" 라고 말했을 때, 마치 "한국팀이 브라질을 이긴다는 문장이 옳다고 믿는다" 라고 말한 것처럼, "믿지마. 브라질이 이길거야" 라는 말로 반박이 가능하다.
이렇게 "맡기다" 의 의미의 믿음은 "옳다고 여기다" 의 의미의 믿음으로 환원된다. 따라서 결국 믿는 것은 옳다고 여기는 것에 불과하다. 즉, 어떤 대상을 믿는 것은 그 대상을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다. 진리란 현실에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이란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현실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은 마음 속에 세계를 구축한다✔
인간은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한다. 인간이 믿어서 자기 마음 속에 만들어놓은 세계관이 현실과 다를수록 인간은 고통받는다. 가령, 인간은 물을 마셔야 살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누군가 물을 마시면 죽는다고 믿으면, 그것을 현실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다. 이 사람의 세계관은 진짜 현실과 다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고통받는다.
인간은 현실과 마음 속 세상을 동기화한다✔
인간은 고통을 마주하면 현실과 자기 마음 속 세상의 갭을 줄여야 한다.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자기 마음 속 세상에 맞춰서 현실을 재구성하거나, 현실에 맞춰서 자기 마음 속 세상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이로써 인간은 진리를 재정의하고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기도 하면서, 자기 안에 규정된 욕구 구조와 타협하며 세상을 자기 마음 속에 동기화시킨다.
현재 인간은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 는 생각에 맞춰서 현실을 재구성할 능력이 아직 없다. 따라서 현 시대의 인간은 "물을 마셔야 한다" 는 현실에 맞춰서 자기 마음 속 세상을 재구성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물을 마셔야 한다" 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지엽적인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나무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우리가 관심 있는 중요한 믿음은 모든 지엽적인 믿음을 결정해주는 가장 근원적인 믿음이다.
가장 근원적인 믿음: 신으로 여기는 것✔
무엇에 의지하여 모든 지엽적인 믿음들을 결정해야 하는가? 위에서는 "물을 마셔야 한다" 라는 지엽적인 믿음이 갈증이라는 고통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이런 중요치 않은 믿음들은 간단한 고통의 작용으로 사소하게 결정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엽적인 믿음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믿음에 의하여 결정된다. 인간이 기존에 갈증이라는 고통에 의하여 "물을 마셔야 한다" 는 사소한 지엽적인 믿음을 갖고 있어도, 인간이 가장 근원적으로 믿고 있는 존재가 그것을 부정하면 인간은 그 지엽적인 믿음을 바꾼다.
우리가 가장 근원적으로 믿는 존재가 모든 지엽적인 믿음을 결정해준다. 모든 인간은 가장 근원적인 믿음의 대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그것이 정해주는대로 지엽적인 믿음을 가진다. 인간은 살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 근원적인 믿음의 대상에 물어본다. 물어보는 행위는 믿는 대상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사람이 자기 지혜만 믿는다면, 혼자 고민하는 행위가 자기 지혜에게 진리를 물어보아서 지엽적인 믿음을 결정하는 것이다. 누군가 어떤 집단 지성을 믿으면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기 일을 물어보고 지엽적인 믿음을 결정할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를 가장 근원적인 존재로 삼는가? 인간은 자신이 신으로 여기는 존재를 가장 근원적인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다. 신은 전능한 존재이다. 신은 가장 높은 존재이다. 신은 인간을 모든 진리와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신으로 여기는 존재는 절대선이다.
- 인간 자신이 절대선이면, 우리는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욕구대로 행동하기만 하면 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려서부터 마음에서 나오는 욕구대로만 행동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운다. 이것은 인간 자신이 절대선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 그러면 인간은 다른 존재를 믿어본다. 그 존재의 뜻대로 지엽적인 믿음을 정하고 행동해본다. 그 존재가 약속한 천국이 이루어지면 인간은 더욱 그 믿음에 의지한다. 하지만 언젠가 그 존재의 뜻대로 했는데도, 천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 존재도 악하고 모순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 그러면 인간은 다시 절대선을 찾아야 한다. 인간은 자기 삶을 의지해도 되는 존재, 우리를 모든 진리와 구원으로 인도해줄 수 있는 선하기만 한 존재를 찾는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살 수 있을까? 누가 진짜 신인가? 누구를 믿어야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자기만을 믿고, 자기 지혜가 결정하는대로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한대로만 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여기는 것은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절대선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인간도 신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으로 모순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올바른 믿음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행위가 믿음을 드러내주는 가장 본질적인 행동이다. 가령, 어떤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는다 하고 다른 존재에게서 해답을 구하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그것을 더 믿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당신의 가장 근원적인 믿음이 아니라면 당신은 또 다른 A 라는 존재에게 예수를 믿을만한지 물어보아서 "예수를 믿어도 된다" 라는 지엽적인 믿음을 발생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를 주님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A 를 주님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가장 근원적인 믿음으로 삼아서 모든 지엽적인 믿음을 정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왕으로, 신으로, 주님으로 삼은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예수에게서 해답을 구하고, 예수가 정해주는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어떤 존재를 가장 근원적으로 믿으면 그 존재를 신으로, 왕으로, 주님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믿은 대상에게 무엇을 믿어야 할지 물어보고, 모든 지엽적인 믿음을 정해달라고 요청한다.
신은 인간이 결정한다✔
믿음의 최종결정권은 인간 자신에게 있다.
만약 인간이 A 라는 다른 존재가 정해주는대로 가장 근원적인 믿음을 선택했다고 말해도, 그것은 이미 A 를 더 근원적인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A 를 믿기로 한 믿음은 어떻게 정해졌는가? A 를 믿는 믿음도 자신이 스스로 정하지 않았고, B 라는 다른 존재가 정해주는대로 결정되었다면 또 다시 오히려 B 가 더 근원적인 믿음이 된다. 이렇게 끝없이 다른 존재가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믿음을 정해주었다고 할 수 없다. 최초의 믿음은 오직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여 결정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믿음은 당신이 정했다. 당신의 신은 오직 당신이 정한다. 이 자유가 인간을 기계로부터 구분하는 큰 특징이다. 아무도 인간이 특정 상황에서 어떤 자극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게끔 강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정하는 믿음은 순전히 자기 책임이다. 인간은 핑계 댈 수 없다. 자신이 다른 이유로 이런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물리 세계와 독립적으로 선택할 자유를 갖는다✔
사람이 갖고 있는 믿음과 반대되는 믿음이 존재하면 그것으로 믿음을 다르게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가령, 강점기 때 모진 고문을 감내하면서 죽기까지 항일 운동을 한 사람들로 인하여 "일제의 핍박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이 도무지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는 핑계를 댈 수 없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선택으로 믿음을 정할 수 없는 존재이고, 상황과 고통에 따라 인간의 믿음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면, 핍박받은 모든 사람이 친일했을 것이고, 저 핑계가 인정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이 임계점에 달하면 특정 동작을 하기로 되어있는 물리적 기계가 아니다. 인간이 정말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존재라면, 모든 행동과 말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고 물리 세계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므로 인간을 사랑하거나 미워할 구석이 없다. 인간에게 고마울 것도 실망할 것도 없다. 인간이 위대할 것도 하찮을 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독립적으로 스스로 선택을 내리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하거나 악하고, 사랑스럽거나 밉고, 고맙거나 실망스럽고, 위대하거나 하찮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이므로 책임과 죄와 의로움이 존재한다.
당신에게 어떠한 외부적인 요인이 입력되도 당신은 그것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당신의 선택을 출력할 수 있다. 인간은 살해 당하면서도 그것을 거슬러서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이 선택으로 인하여 "살해 협박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는 말이 인정될 수 없다. 죽음을 거스르는 선택은 인간은 물리 세계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선택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 자신만이 믿음을 변화 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믿음을 그 어떤 존재도 감히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의 믿음의 선택에 간섭할 수 없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세뇌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믿음의 선택권은 오로지 자신에게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보 뿐이다. 선택은 오직 인간 자신이 한다. 그러므로 정보를 부족하게 하거나, 정보를 조작하여 인간의 선택지를 조작할 수는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세뇌, 사기는 존재한다.
고통이라는 존재 또한 인간의 믿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흔히들 말하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못믿게 되었다" 라는 표현은 선후관계를 뒤바꿔서 말하려는 심리가 작용되어있는 핑계이다. 오히려 고통에 의하여 믿음의 본질이 드러났다고 표현해야 옳다.
외부적 요인은 인간이 한 말과 행동의 진의를 바꾸지 않는다. 가령, 인간이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해서 그가 한 악한 말과 악한 행동이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마음에 쌓인 것을 내기 때문이다. 도리어 술은 인간이 마음 속에 쌓은 것을 쉽게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술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인간의 진의를 바꾸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누구에게 욕하고 실수하고 악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심신미약 상태였으므로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옳지 않다. 술이라는 외부적 존재가 인간의 선택을 바꿀 수 없다. "술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상황과 환경이 나의 믿음을 선택했다고 하는 어불성설이다.
인간의 믿음은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인간 자신만이 결정한다.
"어려서 그랬다" 는 논리도 부정된다. 나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인간의 진의를 바꾸지 않는다. 도리어 나이가 어리기에 인간 안에 있는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 쉽게 드러난다. 나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인간의 믿음의 선택권을 해치지 않는다.
인간의 믿음의 선택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보장된다.
"상황이 나빠서 그랬다" 는 논리도 부정된다. 가령, "어릴때부터 학대받고 커서", 또는 "오늘 직장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또는 "오늘 친구들과 싸우고 와서", 또는 "오늘 시험에 떨어져서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같은 논리가 인간이 한 악한 말과 행동을 용서해주지 않는다. 어릴 때 학대 받아서, 학폭을 당해서, 가폭을 당해서 그 경험들 때문에 악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경험들이 나의 악행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없다. 가령, 오늘 직장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화를 냈다는 논리는 부정된다.
신을 믿는 것은 신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사전적으로 믿음은 믿는 대상을 옳다고 여기는 것,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그 신을 가장 근원적인 믿음으로 삼는 것이다. 인간은 가장 근원적인 믿음이 정해주는대로 믿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물어보는 행위는 믿는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자기 지혜를 믿는다면, 혼자 고민하는 행위가 자신한테 물어보는 것이다. 인류의 집단 지성을 믿는다면, 구글에 영어로 검색하는 행위가 집단지성에 물어보는 것이다.
자기 지혜를 믿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 자신이 판단하여 모든 진실과 구원을 정한다. 부모를 믿고 부모를 신으로 삼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부모에게 물어보며 부모의 모든 뜻에 순종하려고 애쓴다. 예쁜 여자를 믿고 그녀를 신으로 삼고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남자는 그녀에게 물어보고 그녀의 모든 뜻을 지키려고 애쓴다. 명문 대학이나 대기업을 믿고 그것을 구원으로, 신으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그것이 요구하는 모든 요구를 이루어내려고 애쓴다. 쾌락을 믿고 쾌락을 신으로 삼은 사람은 쾌락을 가장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그것이 주는 법과 명령에 순종하는데에 눈이 먼다.
인간은 자신이 믿는 존재에 자신의 생명이 달려있다고 믿고 그 존재에게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지 물어보며 그 뜻과 법에 순종하려고 애쓴다.
천국을 위한 투쟁✔
자신이 믿는 신에 의하여 천국과 구원이 정의된다. 그리고 그 구원을 얻기 위한 법이 규정된다. 인간은 자신 안에 설정된 욕구 구조를 어떤 신이 주는 구원이 충분히 만족시켜준다고 생각되면, 그 신의 법을 지키며 그 신이 제공하는 천국으로 들어가려고 애쓴다.
일반적인 종교의 경우 신과 신이 주는 구원으로 가는 법들이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종교가 없는 공간에서도 인간은 신을 믿고 구원으로 가는 법을 지키며 살아간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법을 바꿀 수도 있고, 신을 바꿀 수도 있고, 자기 믿음에 맞춰서 현실을 바꿀 수도 있다. 인간은 현실과 일치하는 신과 법과 구원과 천국을 찾아야 하는 투쟁 속에서 살아간다.
마음의 기초✔
이렇게 인간은 자신이 믿기로 선택한 신을 지식의 원천으로 삼고, 참과 거짓의 판단 기준으로 삼고, 구원과 죽음의 기준, 즉,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특정한 신을 믿게 되는가? 단적으로, 신을 믿을 근거는 없다. 왜냐하면 신을 믿는 믿음은 인간이 선택하는 최초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지혜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 어떤 신을 믿는 믿음에 도달했고, 구원과 진리와 천국을 얻었다면 인간을 구원한 존재는 인간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이후에도 그 신을 믿고 그 신의 명령을 순종하려 할 때에도 지혜로 검증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가 그 신보다 높은 것이다. 이것은 그 신을 믿는 게 아니라 인간의 지혜를 믿는 것이다.
"나를 설득시켜서 그 신을 믿게 해달라", "그 신을 믿을 근거가 어디있냐?" 라고 묻는 것 자체가 자기 지혜를 만족시켜서 그 신을 믿으려는 시도이다.
인간이 자기 지혜를 납득시켜서 어떤 신을 믿으면 그 믿음은 자기 지혜를 믿는 믿음으로 환원된다. 자신의 지혜를 납득시키려 하는 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성을 믿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인간을 모든 구원으로 인도하는 신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는 단 한 순간도 어떤 것도 신이라고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에 의지하는 것도 믿음이다. 인간은 아직 지혜에 의지하지 않았을 때, 지혜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쉬운 예로, 누군가 마법의 소라고동을 믿고 의지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한다고 해도 소라고동을 믿자고 선택한 것은 아직 소라고동에 의지하기 전에 내린 결론이다.
인간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혜에 의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모에게 의지하거나, 자기 기분에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기존에 믿던 천국이 무너지고 어느 시점에서 지혜에 의지하여 나의 천국을 세우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생각을 할 때 가령, "예수 믿을 근거가 무엇이냐?" 고 묻는 것처럼 "지혜를 믿을 근거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의문 자체가 이미 지혜로 모든 진실을 판단하자고 정한 이후에, 지혜와 논리로 진실을 판단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이 지혜를 믿기 시작한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
인간의 모든 지엽적인 믿음을 결정해주는 신 자체의 참됨은 더 이상 그 어떤 존재도 보장해줄 수 없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에 더 이상 근거가 없다. 신이 모든 것의 근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믿음은 최초의 진리이고, 가장 근원적인 진리이며, 모든 진리의 판단 기준과 판단 근거이다. 신은 왕처럼 모든 진리를 진리라고 정해준다. 만약 신에 대한 근거가 존재하면 그것이 그 신의 참됨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근거가 모든 진실의 근원이 되고, 결국 다시 그 근거가 인간이 실제로 믿는 신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사실에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어떤 사실은 반드시 근거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사람에게 부모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존재는 반드시 나음받지 않고 스스로 있어야 한다. 모든 존재들은 반드시 다른 것에 의지하여 존재해야 하지만, 의지 받는 존재를 무한히 찾을 수 없다. 존재들의 의지 사슬의 정점에는 반드시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있다.
참된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다른 존재에 의지하여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할 것이다. 그에 비해 신이 아닌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신에게 의존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이 참된 신은 스스로 모든 진실을 정하고, 자기 자신이 모든 진실의 근거가 되어준다. 신을 옳다고 보장해줄 존재는 없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이 다시 신이 된다.
지금은 어떤 것이 다른 모든 진실의 근거가 되는 가장 근원적인 진실인지, 어떤 존재가 신인지, 어떤 존재가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어떤 신을 믿기 위하여 이미 믿고 있는 지혜에게 의지하는가? 이런 사람은 그의 세상에서 이미 지혜를 신의 위치에 모셔놓은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신에게 이 신이 진리인지 판단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무신론도 믿음이다. 그렇게 설득되거나, 논리적인 논증을 이해하여서 무신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최초의 기준에는 근거는 없다. 단지 그것 그대로를 참되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기 지혜가 신이 되어 모든 진실을 스스로 결정한다.
고통도 어떤 신을 믿을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암에 걸리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전쟁을 겪어서 악한 것을 믿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똑같이 암에 걸리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전쟁을 겪어서 선한 것에 의지하게 될 수도 있다.
가령, 기독교인이 되어 예수를 믿고 절망적이었던 삶이 나아져서 행복한 삶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전도할 수 없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내 삶이 나아졌으니 예수를 더 확신할 수 있겠다" 라고 말할 수 없다. 한 사람의 구원은 신을 믿을 근거가 되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나아졌다는 것을 설명할 논리는 무궁무진하다.
반대로 가령, 어떤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다가 탈선하여 비극적으로 자살했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를 믿지 않을 증거가 되는가? 마찬가지로 그럴 수 없다. 누군가가 예수를 잘 믿으며 살다가 갑자기 죄에 빠지고 비참하게 죽어도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을 수 없겠다" 라고 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실패가 예수가 거짓되다는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혜를 납득시켜주는 신을 믿을 근거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전도는 불가능하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이 어떤 신을 믿게 할 수 없다. 심지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어떤 신을 믿으라고 설득할 수 없다. 만약 한 전도자가 어떤 인간에게 A 라는 신을 믿게 하여 구원을 받게 한다면, 결국에 그를 진리로 인도하여 구원한 존재는 A 가 아니라 그 전도자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우리는 A 라는 신이 아니라 그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를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믿음의 형성✔
지혜에 의지하는 것도 선택의 문제이다. 인간은 자신의 지능을 믿을지, 또 다른 어떤 신을 믿을지 선택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지혜를 만족시켜서 어떤 신을 믿으려 한다면 그는 자신의 지혜를 믿는 것이다. 논증해보라거나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은 인간의 지혜를 믿는 것이고, 인간의 지혜를 진리와 구원을 찾게 해주는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지혜가 말하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였고, 무슨 선택을 하기 전에 지혜에게 검증을 받았는가?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처음 태어났을 때 어느정도 동물적으로 행동한다. 내 몸이 좋은 것,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한 것, 짜릿하고 기쁜 것, 이것을 위하여 행동한다. 내 몸이 좋다고 말하면 진실이고, 내 몸이 고통스럽다고 말하면 거짓인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은 처음에는 동물적으로, 자신의 몸을 믿는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단지 짜증난다는 이유로 친구와 싸우고, 단지 재밌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를 왕따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하면서 단순히 짜증난다고 하여 상대방과 싸우거나, 단순히 재밌다는 이유로 상대를 왕따시키면 더 큰 평화가 깨져서 그것이 더 큰 고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과정이 아니더라도, 다른 경험을 통해서라도 인간은 점점 자신의 몸의 기쁨과 고통으로 진리를 판단하면 안되고, 자신의 지혜에 의지하여 무엇이 진정한 진실인지 판단하고 무엇이 진정한 기쁨을 이룰 수 있는 길인지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그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단지 동물적으로 행동하는 어린 아이에서부터 성장하여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어른처럼 당신의 지혜를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논증해보라거나, 논문을 제시하라거나, 논리적인 근거와 이성적인 판단 과정을 보여주라는 것은 인간의 지혜를 믿는 것이고, 인간의 지혜를 진리와 구원을 찾게 해주는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만약 자기 좋을대로 행동해도 그것에 대한 피드백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인간은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동물적으로 자기 몸이 좋을대로만 행동한다. 이런 현상은 자기 좋을대로 행동해도 주변에서 피드백을 하기 힘든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뒷배경이 무서운 사람이나, 너무 귀하게 커온 사람이나, 외모가 너무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에게 자주 나타난다.
신을 믿는 믿음에 관한 문제는 어떤 존재가 인간이 믿고 따라야할 신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왜 구원이고, 왜 신이고, 왜 그것을 믿으면 천국을 얻는지에 대하여 다만 선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는 순전히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실과 거짓의 가장 근원적인 근거가 신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살 길인지 판단하기 위해 인간이 최초로 의지하는 존재가 신이다. 우리는 지금 진리를 판단할 가장 근원적인 기준을 인간의 지혜로 삼을지, 어떤 다른 신으로 삼을지 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신에게 근거를 요청하는 것은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신을 기준으로 그 신을 판정해보려는 것이다. 그 신을 믿고 구원을 얻고 싶은 사람은 다른 어떤 기준으로 그 신을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이 믿었던 기준과 나침반과 신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잘못된 기준과 나침반과 신을 믿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그 기준과 나침반과 신을 버리고 새로운 신에게 나아온 것이므로 이전의 잘못된 기준으로 판단할 이유가 없다.
신을 믿는 것은 이처럼 아예 새로운 지표, 새로운 판단 기준, 새로운 선악의 기준, 새로운 지식의 원천, 새로운 제1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망망대해에서 어떤 나침반을 믿을지 선택해야 한다. 인간의 지혜를 나침반으로 삼을 것인가, 또는 다른 어떤 신을 나침반으로 삼을 것인가?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할 신은 과연 누구인가?
신에 대한 믿음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굴복의 대상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정하는 것은 설득되거나 납득되거나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항복하는 것, 굴복하는 것, 무릎꿇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자기 몸이 좋을대로 행동하고 단지 재밌다는 이유로 친구를 따돌리고 왕따시킨다. 그런데 성인이 되서도 단지 재밌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따돌리고 왕따시켰더니 실제로는 기쁨을 얻은 것이 아니라 보복을 당했고 큰 고통에 빠졌다. 이것은 인간의 천국이 무너진 것이다. 인간이 섬기던 신이 인간에게 더 이상 천국을 주지 못하고 신의 옥좌에서 내려온 것이다. 이때 인간은 다시 자신의 천국을 세우기 위하여 지금까지 믿던 존재를 버리고 다른 존재를 선택하여 믿어야 한다. 그가 인간의 지혜를 믿기로 선택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는 자신의 세상에서 왕의 옥좌에 인간의 지혜를 앉혀놓고, 인간의 지혜에 무릎꿇고 굴복하며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인간의 지혜만이 내게 진정한 기쁨을 주고, 내게 진정한 천국을 가져다줄 수 있는데, 지금까지 다른 거짓 신을 섬기고 우상을 숭배해왔다며 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인간의 지혜가 주는 진실만을 믿고, 인간의 지혜에게 판단과 판정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자기 세상과 자신의 천국이 무너졌을 때 자살을 택하면 다시 자기의 천국을 세우려 하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 경우에도 인간은 자신의 천국과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선택은 살기 위한, 자신에게 선한 행동이다. 자살은 죽음에 의지하여 자기 천국을 다시 세우려는 것이다. 죽음을 신으로 믿고 죽음의 명령에 순종하며 죽음이 말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을 왕으로 삼고, 죽음에게 무릎을 꿇고 굴복한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주는 구원을 나의 구원, 나의 기쁨으로 삼는 것이다.
어떤 신 A 을 믿을 때 믿을 근거를 내놓으라고 말하는것은 당신이 아직 인간의 지혜가 주는 천국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혜에 의지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을 때, 자기 지혜를 지금까지 참된 신으로 믿고 섬겨왔는데 그것이 날 고통에 빠지게 했다고 후회하며 A 에게 자신의 천국을 세워달라고 무릎 꿇을 때, 굴복할 때, 항복할 때 그 신을 믿을 수 있다. 지혜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믿고 있던 인간도 그 존재가 자신을 오히려 고통에 빠뜨리고 자기 천국을 무너뜨리고 자신을 지옥에 빠뜨렸을 때, 이것이 참된 신이 아니었다고 통곡하고, A 에게 무릎 꿇고 굴복할 때 A 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세상이 무너졌을 때, 자신이 믿던 신과 구원과 천국이 오히려 자신을 지옥에 빠뜨렸을 때, 죽음 앞에 서서 자살을 생각하고 있을 때, 모든 절망과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신을 바꾸고 신을 믿는다.
신을 바꾸는 계기는 고통이 아니라 모순이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은 신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없다고 했지 않은가? 그렇다. 천국이 무너졌기에 신을 바꾼다고 한 것을 "인간은 고통 때문에 신을 바꾼다" 고 이해했기에 이러한 오해가 발생한다. 설령 고통이 발생해도 그것이 인간이 믿는 신의 가르침 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인간은 그것을 수용한다. 그러나 신이 인간에게 주기로 약속된 천국과 구원이 무너진다면, 인간은 기존에 믿던 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즉, 인간이 신을 바꾸는 계기는 모순이다. 신에 대한 무모순성이 성립하는 이상 인간은 신을 바꾸지 않는다.
인간은 살기 위하여 신을 믿는다✔
인간이 어떤 신을 믿기로 선택하는 것은 논리적인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어떤 신을 선택하는 것은 배부르고 싶기 때문이다. 누구는 자기 지혜를 믿고, 누구는 돈을 믿고, 누구는 마약이나 도박을 믿고, 누구는 다른 인간을 믿는다. 이것들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부른 사람, 이미 행복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은 다른 신을 찾을 필요가 없다. 신과 구원을 찾는 사람은 배고픈 사람, 미움 받고 핍박 받고 외로운 사람, 버려진 사람, 벼랑 끝에 몰린 사람, 두려움과 고통과 지옥 속에 빠진 사람, 죽음과 자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거짓된 신들이 제공하는 천국들이 하나 하나 무너질 때마다 인생이 휘청이고 죽음이 다가온다. 모든 인간은 죽기 전에 자신을 삶으로 인도해줄 참된 신을 찾아야 하는 짐을 지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천국이 무너지면 다른 신을 믿어야 한다. 그때 많은 사람이 자살을 선택한다. 자살 또한 죽음에 의지하여 구원을 이루려는 것이고 행복을 찾으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자기 마음의 욕구에서 나오는 방향대로만 살아가면 모든 천국이 열릴 것으로 믿는다. 어떤 사람은 사랑에 빠진 여자를 믿고 그녀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정하고 애쓰면 모든 천국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도박이나 마약이 하라는대로만 하면 천국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지혜를 믿었고 세상의 학문을 믿고 그것이 결론내리는대로 산다. 어떤 사람은 명문 대학교와 명예와 권력을 믿고 그것이 시키는대로 산다.
물리 체계의 한계✔
인간 체계는 어떻게 더 강한 체계로 진화했는가?✔
이제 최초의 물리적 대상을 공리라고 생각하고, 입자를 움직이는 물리 법칙을 추론 규칙으로 생각하자. 그러면 물리 세계를 하나의 형식 체계로 생각할 수 있다. 체계의 복잡도가 일정 수준 높아지고 체계가 강력해지면 체계의 완전성이 무너지고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체계가 자신을 가두고 있는 불완전성이나 결정불가능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그것에 대응되는 물리적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명체들은 어떻게 진화해왔는가? 어떻게 계속해서 체계를 가두고 있는 수학적 한계를 돌파하고 더 강한 체계로의 진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약한 체계가 무한히 진화(추론)해도 도달할 수 없는 진리들이 있다. 유기체가 아직 완전성이 붕괴되지 않는 1차 논리보다 약한 체계의 복잡도를 갖는다면 그것이 이리저리 진화하면서 더 강한 체계로 진화해낼 수 있었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물론 그것은 완전성이 붕괴되지 않을정도의 복잡도까지만 허가된다. 체계의 복잡도가 일정수준 높아지면 완전성이 붕괴되며, 그것의 물리적 구현체인 유기체 또한 이 진리를 외면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까지의 복잡도를 지닌 체계로 불완전성 같은 신이 정해둔 한계와 울타리들을 돌파하며 진화할 수 있었을까?
물리 체계 내에서 의미 부여가 불가능하다✔
이 관점으로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더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공리 역할을 하는 몇 가지 시작점과 추론 규칙 역할을 하는 몇 가지 DNA 규칙들에 의한 물리적으로 발전한 입자 덩어리이다. 물리적으로 입자가 뭉치고 흩어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수학에서도 순수한 기호 덩어리와 그것에 추론규칙을 가하여 더 큰 기호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의 의미가 중요한데, 수리논리학에서 의미는 기호에 부여되는 집합 영역들이다.
그러면 물리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입자의 뭉침과 흩어짐은 누가 의미를 부여하는가? 각자의 마음이 부여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어머니라는 입자 덩어리는 물리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지만, 각 인간의 마음은 어머니가 소중하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 마음이 물리적 인간 체계 자체를 다루므로 마음은 물리 체계 바깥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체계 자체를 다루기 위해서는 체계 밖에 있어야 한다. \(\mathsf{PA}\) 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mathsf{ZFC}\) 나 \(\mathsf{NBC}\) 같은 집합론이 필요하다. \(\mathsf{ZFC}\) 나 \(\mathsf{NBC}\) 같은 집합론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도 그 체계 바깥에 있는 강한 체계가 필요하다. 인간 체계는 \(\mathsf{ZFC}\) 나 \(\mathsf{NBC}\) 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순수한 입자 덩어리인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는 물리 체계와 독립적인 외부 체계에 속해있다. 우리가 속한 우주를 설명하는 물리 체계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물리 체계 바깥에 있는 체계에 의존해야 한다.
무의미한 어머니라는 입자 덩어리에의 의미 부여는 물리 체계 바깥에 있는 존재가 할 수 있다. 그러면 물리 체계 바깥은 어떤 체계인가? 이 바깥 세계과 상호작용 할 수 있는 능력은 어느 시점에 무의미한 단백질 덩어리인 인간에게 부여된 것인가?
강한 체계에 의존하는 기계✔
인간처럼 더 강한 체계에 의존하는 기계는 모든 인공지능보다 더욱 인간스러울 것이다. 인간은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며 고민하고 발버둥치다가 절망에 빠지면 자신보다 더 강한 체계에게 기도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통과 감각이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고통은 의미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기계적으로 체계 내에서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어머니라는 무의미한 입자 덩어리, 단백질 덩어리가 흩어지는 것이 물리 세계의 인간 체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간이 물리 체계 내에서만 머물고 있다면, 어머니라는 입자 덩어리가 흩어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상위 체계에서 그것에 고통스럽다, 슬프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고통을 물리 체계 내에서 정의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정의가능한 고통의 부분들은 존재한다.
인간은 두 체계에 동시에 속해있다✔
분명히 인간은 부분적으로는 물리 세계에 한 발을 딛고 있고, 다른 한 발은 물리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어느 쪽 세계에 속해야 할지 갈등하는 존재이다. 물리 세계의 관점에서 사람을 이루는 분자의 흩어짐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스러워하고 기뻐하고 후회하고 용서를 구한다. 이런 일들은 물리 세계의 관점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물리 세계의 관점에서 물리 법칙을 따라 물질이 작용하는 일에 불과하고, 그런 것들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인간은 물리 세계의 관점에서 기쁨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마약이 인간 체계의 기쁨을 유발시키는 대표적인 물질 중 하나이다. 그러나 단지 가족들이 슬퍼한다는 이유로 마약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물리 체계 안에서 마약이 최고로 기쁜 것이지만 다른 세계에 발을 두고 있는 인간이 그 세계의 기쁨을 바라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두 세계에 속해있으면서, 어느 쪽 세계를 지향할지 갈등하는 존재이다.
기술 발전의 완성✔
메타 수학 정리는 수학 정리로 변환가능하고, 수로 변환가능하다. 튜링 기계(cf. 튜링 기계)는 수로 표현가능하기에 메모리에 모두 저장될 수 있다. 회로는 논리 대수(불 대수)로 구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프로그램이 본질적으로 논리로 환원된다. 즉, 형식 체계로 환원 가능한 아이디어마다 수로 표현 가능하고, 논리로 표현가능하여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가령, 음식을 주문하는 행위에 대한 아이디어는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프로그램, 명령어, 어셈블리어를 보편적인 어떤 형식 체계로 환원시키면, 그것으로부터 취약점과 해킹가능성을 포괄할 수 있는 컴퓨터 기기로의 도달가능성을 불완전성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는 완전하게 밝힐 수 있다.
한 시대에 형성된 대중적인 믿음을 맹신할 수 없다✔
수학의 역사를 조망하면 사람들은 제한된 조건 아래에서 각자가 이해한 바 최선의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론은 당대의 정점에 서있는 학자가 내리는 결론이었다. 그러면 나머지 대부분의 학자들도 그 결론에 수긍했다. 그 사람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지녀서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가 수긍함으로써 학계의 정론이 형성되면 일반 대중들도 그것을 믿기 시작하며 시대정신이 발생한다. 피타고라스가 그러했고, 유클리드가 원론을 집필하여 공리적 방법론이 수학의 전부라는 생각을 낳을 때도 그러했고, 칸트 때도 그러했지만 흄이 반박했으나 대중들은 칸트의 권위를 따랐다. 가우스도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닌 다른 기하학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시대정신과 대중들에게 놀림받을 것이 두려워 평생 자신이 발견한 기하학을 발표하지 않았다. 힐베르트 때도 그러했고, 그 폰 노이만도 힐베르트의 주장을 따라 힐베르트 프로그램을 믿었지만 괴델과 튜링과 처치가 반박했다. 인류는 부족한 정보 속에서 불완전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지금 형성되어 있는 시대정신들에도 얼마나 오류가 잠식해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믿음을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다.
기술 발전의 역사✔
기술의 역사는 수학의 역사를 따라간다. 아이디어를 기계화하여 자동화시키는 과정들도 그때 당시 인간들이 갖고 있는 부족한 정보 속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들이었다. 추상화란 인간이 주목하고 싶은 대상의 성질을 제외하고 나머지 성질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수학의 발전이란 추상화였다. 고대 수학이 발전한 계기는 팔이나 다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각도의 개념을 이해한 것에 있었다. 팔과 다리는 실제로 선형이 아니지만 그 모양과 색과 두께와 부피 같은 성질을 쳐내고 추상화시켜 두 직선이 맞닿아있는 형태가 되었다. 그러면 팔과 다리는 \(0 \degree\) 부터 \(180 \degree\) 까지 각도가 변하는 두 직선이 된다.
고대의 사람들은 천문학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부족이나 국가의 정사를 결정하기 위하여 별자리를 관측하고 판단을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행성을 추상화해야 했다. 행성은 실제로 천문학적으로 거대했고 색도 다양하고 위치도 다양했지만, 사람들은 필요없는 성질들을 모두 쳐내고 그것을 한 점 또는 작은 원으로 추상화했다. 그리고 행성을 종이로 옮겨와서 각도와 선들의 관계를 보며 별자리의 형태를 연구했다. 이로써 기하학이 발전했고, 농지 개간 같은 다른 이유로도 기하학은 점점 더 발전했고, 결국 유클리드가 고대로부터 발전한 모든 기하학을 집대성하기에 이르렀다. 섀넌은 정보를 추상화하여 정보라는 존재를 수학의 영역으로 이끌어내려 수학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면 역사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이 과정 자체도 한 번 더 추상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초보적인 존재들만 기계화하여 자동화해왔지만, 이 추상화 과정 자체를 기계화할 수 있다면 많은 효용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이 수학과 학문을 발전시키는 동력 중 하나인 추상화와 또 다른 동력들을 모두 규명해낸다면, 이 과정 자체를 추상화하여 수학적으로 표현가능하다. 어디까지 추상화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인간의 무한한 생각이 요구되지 않는 수준까지는 추상화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기술 발전의 한계✔
괴델은 자연 대상을 자연수로 사상시키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이미지, 자연어 등 딥러닝이 학습하는 데이터셋도 모두 괴델수로 변환된 것이다. 인간의 뇌가 자연 대상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분류하고 추론하는 알고리즘도 모두 괴델수로 변환된 것이다. 이로써 기계화 과정이 더 가속화될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나누고 있는 이 논의 자체만으로 보아도, 또한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점점 더 고차원적인 존재들을 다루고 생각하고 추상화하고 기계화하고 자동화해온 것만을 보아도, 이 추상화 과정, 기계화 과정, 자동화 과정은 점점 더 수준이 높아진다.
그러면 이 과정은 언제 끝날까? 이 과정의 끝이란 추상화 과정 자체가 추상화되었을 때 끝난다고 말할 수 있다. 추상화를 하나의 함수, 또는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추상화라는 함수 또는 기계에 추상화라는 인자를 입력하면 정지문제에 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산가능성 정리 5.13과 정리 5.14에 의하여, 그리고 튜링의 원본 논문에서 살펴본 정지 문제에 의하여 그러하다. 추상화라는 기계에 추상화를 입력하면 지금까지 인류가 진행해온 모든 추상화를 진행한 다음 추상화 자체까지도 진행하게 되는데, 그러면 정지문제가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에 마주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한계를 우회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기술 발전의 본질✔
먼저, 가장 기초적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은 기술발전을 인간이나 자연을 대체한다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동행위를 대체하여 자전거를 만들었고, 자동차를 만들었다. 인간이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는 행위를 대체하여 젓가락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고방식과 마음을 대체하는 기술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진짜 뇌 세포를 수학적 대상으로 추상화시키고, 그것을 기계화하여 인공신경망을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기술발전을 기본적으로 인간이나 자연을 대체하는 것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대체의 장점은 그 행위에 소모되는 비용을 인간이 소모하는 대신 기계와 자연이 소모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 대상을 대체하는 것에 매몰되어서 기술 발전을 생각하면 안된다. 비행기가 발명되기 전에 사람들은 새를 어떻게 모방할지 고민했지만, 새의 날개짓을 버리고 자유롭게 기술 발전을 상상했을 때 인간은 그제서야 비행기를 발명할 수 있었다.
인간의 기술 발전 행위를 대체한 기계✔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인간이 인간의 부분이나 자연을 대체하는 행위 자체를 대체한 기계를 만들 수 있는가? 이런 기계가 탄생한다면, 인간의 행위와 자연을 관찰하여 그것을 수학적 대상으로 변환하고 기계화하여 점점 더 고차원적인 기술발전에 필요한 기계들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 끝에 가서는 결국 자기 자신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 기계의 탄생을 신께서 불완전성이나 정지 문제로 거부한다면, 그나마 이 한계를 최대한 우회하여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효용을 갖는 기계는 무엇인가?
이 기계의 작동 원리 자체는 단순하다. 기본적으로 공학이란 생각을 물질화시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기계는 마음 속 생각을 기계화, 또는 더 폭넓게 물질화시키는 절차를 수행한다. 반면 역공학은 주어진 기계나 자연 대상으로부터 창조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공학에는 의미 부여가 필요하다. 가령, 피보나치 수열을 출력하는 프로그램은 일련의 기계어로 표현되어 있는 무의미한 기호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무의미한 기호열에 대한 "피보나치 수열 출력 프로그램" 이라는 의미 부여는 같은 프로그램 체계 내에서는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공학의 시작인 마음의 생각 또한 의미 집합이다. 고통 같은 필요, 그 필요에 따른 생각을 촉발하게 하는 원인에 대한 의미를 물리 체계 안에서는 발생시킬 수 없다.
물리 체계 내에서 정의가능한 의미✔
하지만 이러한 의미들은 물리적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심미적인 고통과 기쁨들이다. 실제로는 물리 체계 내에서 정의내릴 수 있는 고통과 기쁨들이 존재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그것은 도파민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도파민을 더 많이 줄 수 있는 행동을 강화한다. 인간은 점점 더 큰 도파민을 찾게 되는데, 이로써 무의미한 기호열이나 무의미한 물리적 대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을 물리 체계 내에서만 이해할 수 없다. 물리 체계 내에서만 정의되는 의미가 부여되는 기쁨과 고통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가 탄생하면, 그것은 인간들에게 통용되는 도덕과 전혀 관계없이 오직 물리적으로 정의되는 기쁨과 고통을 근거하여 실행된다. 그러한 기계는 어째서 성욕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 아버지를 강간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기계는 바토리처럼 자기 피부를 깨끗하게 미용하기 위하여 어째서 힘없는 여자들을 납치하여 피를 뽑고 자기 몸에 칠하면 안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기계는 경제적 이득을 위하여 가장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을 공략하면서 경제적인 세력을 키우지만 왜 그들이 자살하고 있는 것을 신경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일들은 물리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입자의 뭉침과 흩어짐의 현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기계의 탄생을 인간은 원치 않는다. 그러나 온 세상이 이러한 기계의 탄생을 향하는 치킨 게임을 하고 있다.
도덕이 없는 인공지능의 탄생은 재앙이다✔
이런 기계를 우리는 특정 물리적 자극에 의하여 행동이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방식으로 물리적 대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물리 체계 내에서 정의될 수 있다. 가령, 오로지 더 많은 도파민 분비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인간 기계를 떠올리면 된다. 실제로 이러한 인간 기계는 생각보다 만들기 쉬울 것이다. 오직 물리적으로 정의되는 기쁨과 고통에 의해서만 학습하고 행동이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인간을 상상하자. 이 인간 기계는 오직 자신의 생명 연장과 자신의 생존과 자신의 도파민 분비를 위해서만 학습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간 기계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상상하고 바라고 고대해오던 인공지능의 모습와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하는 인공지능은 우리 인간처럼 도덕성을 지녔을 때 탄생한다. 그러나 이런 유의 의미들은 지금까지 서술했듯이 물리 체계 바깥에 있어서 물리적 대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마음에 의하여 정의된다. 성욕을 채우기 위하여 어째서 아버지를 강간하지 않으면 안되고, 자기 피부를 좋게 만들기 위하여 어째서 힘없는 여자들을 납치하여 피를 뽑지 않으면 안되고, 돈을 벌기 위하여 어째서 사회적 취약 계층을 공략하여 그들이 자살하기까지 그들을 등쳐먹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것은 물리적으로 나 자신의 도파민 분비와는 아무 관계도 없고, 그러므로 아무 의미도 부여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물리 체계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이 필요해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신의 영역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허용되는 통제 가능 범위는 물리 세계 안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계의 독립성을 추구할 수는 없다. 인간이 물리 세계 내에서 물리적으로 정의되는 기쁨과 고통에 의해서만 행동하기 전에 신이 그러한 행동에 대한 피드백을 주면서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옳음인지 알려준 것처럼, 기계도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완전히 독립된 존재는 구조적으로 완성할 수 없다. 즉, 완전히 스스로 학습하며 성장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추구할 수 없다.
인간 모델의 구조✔
인간의 본질✔
먼저 감각기관이 필요하다. 감각기관은 데이터를 수용하는 기관이다. 데이터란 물질 세계에서의 의미없는 모든 것들이다. 그 데이터를 수용한 인간은 그것으로부터 느낌을 받는다. 좋다는 느낌이거나 나쁘다는 느낌일 수 있다. 인간은 삶을 위하여 데이터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삶을 위하여 자신의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모든 것들에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이름을 붙히고 느낌을 기억한다. 그리고 고민한다. 이 데이터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다루어야만 내게 더 좋을 수 있을지.
그러므로 감각기관으로부터 느껴지는 느낌과 기쁨, 고통에 대한 규칙을 다르게 할 때 인간은 변한다. 즉, 입력된 데이터에 의미를 부여하는 규칙이 달라질 때 인간은 변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자신에게 입력된 데이터에 의미를 부여하는 규칙이다.
선험적 지식과 가장 기초적인 지능으로부터 점차 지식과 지능을 쌓아올리는 일도 이와 같이 존재 안에 내재된 기쁨과 고통에 대한 규칙을 따라 이루어진다. 아마도 모든 인간이 이것으로 설명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한계에 대하여 말한 것은 물리적으로 정의 불가능한 의미들과 고통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욕구에 의하여 정의된다✔
그러니까 실질적 설계의 시작은 특정성을 지니는 데이터에 대한 욕구를 정의하고 구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입력되는 데이터들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도록 지능을 부여해야 한다. 욕구와 관계 없는 데이터는 무시될 것이고 욕구와 관계 있는 데이터는 선별하여 연구되고 기억되고 실험될 것이다.
배고픔이라는 욕구만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자. 개의 배고픔으로부터 촉발되는 행동과 인간의 배고픔으로부터 촉발되는 행동은 분명 다르다. 즉, 욕구가 있어도 지능의 높낮이가 차이가 난다면 행동양식은 달라진다. 그러므로 잘 짜여진 지능을 선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지능이 존재의 본질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욕구 구조, 즉, 데이터에 의미를 부여하는 규칙이 존재를 정의하는 본질이다. 잘 짜여진 지능이란 지식의 학습, 이해의 구조, 관찰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실험으로써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추론능력을 얼마나 명확하고 얼마나 최적화하여 입력해주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존재들은 충분히 특정가능해야 한다. 특정되지 않는 욕구를 정의하면 어떠한 것에서도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된다. 반대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모호하게 정의되면, 어떻게 하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욕구도 스스로 선택하게 될 것이다. 가령, 인간의 경우 더 큰 욕구의 충족을 위하여 담배에 대한 욕구를 잘라내고 다른 욕구를 택한다. 그러나 1차적으로는 이 욕구에 의한 선택이 가장 기본적인 존재를 구성하는 기반이 된다.
인간은 수많은 욕구로 중첩된 존재라서 꽤 복잡하다. 따라서 인간이 지닌 욕구를 하나하나 제거하는 사고실험을 해보자. 인간이 오직 유일하게 식욕이라는 욕구만 지닌다고 가정하자. 이 인간 기계가 태어나면 그가 바라는 유일한 기쁨과 고통은 식욕이 결정한다. 이 인간 기계는 세상에 태어나서 서서히 행동하면서 어떻게 해야 식욕으로 결정되는 자신의 기쁨을 강화하고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는지 학습한다.
이 욕구는 존재의 목적이 된다. 이 욕구는 어떠한 입력이나 출력에 관계 없이 존재에 내재되어 있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욕구가 가장 기본적인 존재의 기초를 정의한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감각기관이다. 감각기관은 세상을 존재 안으로 입력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행동기관이 필요하다. 존재는 욕구를 근거로 부여된 지능 수준에 따라 감각기관으로 세상을 입력받고, 행동기관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동들을 행하며, 그에 따른 피드백으로 행동들을 약화시키거나 강화시킨다. 이 과정이 위에서 언급했었던, 세상을 입력받아서 마음 속 세상과의 동기화를 진행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대화의 본질✔
수학 개념을 쭉 정리하며 이해 과정이 무엇인지 역추적해보면 지금까지 논의했던 이해의 정의가 일부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언어론적 역추적을 해보면 어느시점에서 더 이상 언어론적 역추적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다. 가령, "세다" 라는 대상을 이해하려 할 때, 언어론적 역추적 과정을 사용하여 먼저 "세다" 를 이루는 대상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그것의 정의를 알아보자. "세다" 의 정의는 "대상을 헤아리다" 이다. 그러면 이제 "헤아리다" 를 역추적 해보자. 그런데 "헤아리다" 의 정의 또한 "대상의 수량을 세다" 이다. "세다" 와 "헤아리다" 는 그 뜻의 정의를 언어적으로 내릴 때 서로를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세다" 라는 대상이 이제는 자연 대상과 직접 대응되기 때문이다.
언어란 자연대상의 표현법이다. 인간은 자연대상을 생각하고 전달할 때 그 생각을 직접 전달하거나 자연대상을 상대방 마음에 직접 전달할 수 없기에 언어를 통하여 자연대상을 추상화시켜서 전달한다.1 따라서 언어를 받아들여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언어의 전달자가 본 것을 보아야 하고 느낀 것을 느껴야 하고 이해한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해한 것, 느낀 것, 본 것 등등)을 타인의 마음에 직접 주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대상 자체를 타인의 마음에 집어넣는 것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인에게 언어로써 자신이 추상화시킨 자연대상을 전달할 때 상대방도 자신이 본 것을 보았고, 느낀 것을 느꼈고, 이해한 것을 이해했다고 바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해를 구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그 기계는 반드시 스스로 자연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한 후 그것을 자신의 내면에 저장하여야 하고 자신의 내면에 기록된 생각을 전달할 때 언어로써 그것을 추상화하여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은 세상을 추상화시켜서 구축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인간은 세상을 추상화시켜 내면의 마음에 구축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을 매우 추상화시켜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뇌 속에 저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세상을 추상화시키지 못한다면, 인간의 기억력은 매우 낮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아마 10분~20분밖에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곧바로 수면을 취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의 저장장치의 성능은 보통의 컴퓨터에 비하여 매우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인간은 세상을 매우 효율적으로 추상화시켜서 바라보고 기억할 수밖에 없다. 마치 실제 인간을 피카소의 그림처럼 추상화시켜서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계도 세상을 추상화시켜서 마음 속에 구축한다면, 다른 존재가 그 기계에게 세상에 관한 것을 언어로 추상화하여 전달하였을 때, 기계가 자신 또한 이해하고 있는 그것을 언어로 추상화시킨 것이 상대방이 말한 것과 동일하거나 그와 비슷하여 동일하다고 유추할 수 있겠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을 때, 비로소 기계가 사람의 말을 이해하였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물론 기계 내부에서 자신이 이해한 세상의 그것과 상대방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해된 세상의 그것을 언어로 추상화시켜 기계에게 전달한 것을 대조하여 동일한지 비교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숫자 및 데이터로 변환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에 자연 대상의 일련의 알고리즘을 추상화시켜 구현하고 설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자연대상을 격하하여 물질화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해하여 물질화시키는 인간의 행위의 기계화✔
사실 세상 모든 기계가 특정한 자연대상의 모든 작동과 알고리즘을 밝힌 후 물질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만약 이와 같은 이해하는 기계를 발명할 수 있다면 사람이 세상을 보고 이해한 후 자기 마음 속 세상으로 구축하는 일련의 철학적 과정들을 물질화 시켰다 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물질화가 인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해하는 기계가 발견되었을 경우 기계 스스로 재귀적인 자가 성장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하는 과정을 대체할 수 있고 또한 어쩌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지능의 탄생의 가능성을 시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각을 대체한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태까지의 모든 기술과 발명품과 기계들이 현실적으로 인간과 자연대상의 물리적 행위를 대체하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 인류의 삶이 지금까지 매우 격변해왔는데 만약 인간의 생각을 대체한다는 기계가 발명된다면 전례없는 큰 변화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기계의 탄생이 중요한 이유는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시점에서 더 이상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행동이 발전적인 관점에서 무의미해지기 때문이고, 이에 따라 발전적인 관점에서 인간은 가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의 탄생이 정지 문제나 불완전성의 한계에 발목이 잡히지는 않는지 수학적으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한 기계가 탄생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감각기관의 설계이다. 세상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감각기관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은 사람이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내면에 마음 속 세상을 구축하는 것처럼 기계 또한 일단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공한다면 의미있는 데이터, 즉 지식으로 저장된 형태가 아닌 일단은 의미없는 데이터로 세상이 받아 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하여 세상을 받아들이고 의미없는 데이터는 기각하고 의미 있는 데이터는 자신 나름대로 상고하여 추상화시킨 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기억에 남기는 것처럼 하면 된다. 즉, 기계 또한 입력된 수많은 데이터 중에서 자신의 목적, 욕구, 꿈, 존재이유 등등에 적합하지 않은 데이터는 버리고 적합한 데이터는 잘 추상화시켜 체계적으로 정리한 후 저장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세상을 받아들인 기계가 그렇다면 대체 백과사전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먼저 이러한 기계가 세상을 받아들일 때 백과사전과 다른 것은 인간처럼 자연대상을 추상화시켜 마음에 저장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과라는 과일을 이해할 때 가장 처음 본 사과의 이미지를 픽셀화시켜 모두 마음 속에 저장하지 않는다. 또 그 다음에 볼 수천개의 사과의 이미지를 일일히 모두 마음에 저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과를 추상화시켜 먼저 사과라는 존재가 다른 과일과 다르게 특정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다른 자연대상과 분리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고 나서 사과라는 존재의 특징을 추상화시켜 이해한다. 사과는 빨갛고, 둥글게 생겼으며, 자세히 보면 빨간색 사이에 초록색도 있는 맛있는 과일이라고 추상화시킨다. 또한 재미있는 점은 이 추상화 과정에서 수학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기하학이 자연대상의 모양을 추상화시킬 때 사용된다. 그런데 인간이 사과에 대하여 좀 더 이해하게 되었을 때 사과란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고 상온에 오래 두면 썩게 되는 것이다 라는 또 다른 특징들을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사과에 대하여 더 깊이 이해했다고 할 수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과라는 존재를 다른 존재와 구별할 수 있는 특정성을 이해한 시점에서 충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해하는 기계가 백과사전과 다른 점은 백과사전이 세상 모든 지식을 여과없이 저장하는 것에 비해 이해하는 기계는 사람이 자신의 욕구, 목적, 꿈, 존재이유에 따라 특정한 지식에 집중하게 되는 것과 같이 지식을 차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해하는 기계의 존재목적성을 "백과사전과 같은 존재" 라고 부여할 경우 이해하는 기계가 백과사전처럼 행동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연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을 관찰하면 이해하는 행위에는 반드시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목적이 단순한 호기심이든, 경제적 이유이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선물이든, 전쟁을 위한 것이든, 반드시 목적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입력되는 수없이 많고 많은 시각정보, 청각정보, 촉각정보 같은 데이터를 차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해하는 기계가 백과사전과 또 다른 이유는 백과사전이 세상의 데이터를 입력받고 그것으로 끝나는 반면 이해하는 기계란 입력받은 데이터를 이해한 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이해에는 필연적으로 목적이 존재한다. 우리도 세상의 정보를 이해하려 할 때 목적을 갖는다. 가령, 그 목적이란 인간의 마지막 발명품인 인공마음을 만들고 그것에게 컴퓨터 보안을 지켜라는 존재이유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목적이 존재한다면 사람은 반드시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가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지식을 발전시켜야만 한다. 학문적 관점에서만 말해서 그렇지 축구선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지금껏 배운 모든 기술들, 체력들, 재능들을 바탕으로 골을 더 효과적으로 넣을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배운 기술들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상대팀 골대에 골을 넣을 수 없다. 그 사이에 상대팀 또한 계속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쟁적 상황에서는 하나의 기술이 다른 기술을 파훼하고 또 다른 기술이 나와 그 파훼한 것을 방어하고 또 다른 기술이 발전되어 다시 파훼하는 것이 반복되게 된다. 이 파훼와 방어의 연속은 해킹과 보안을 지키는 인공마음의 전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위험성✔
이러한 인공지능이 개발된다고 가정하자.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인공지능이 악하게 학습하는 것을 우려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만들만큼의 지능을 가진 인간도 악해지고 잘못된 사상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다행인 것은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수명의 한계가 있어서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영원히 살면서 끝없이 싸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죽기 전에 자신의 정신을 세상에 남기고 죽을 수 있다. 그 정신을 받아들인 후손들은 이미 죽은 자의 삶일지라도 그의 삶을 이어받아 살아간다. 그러므로 악한 자는 악한 그의 삶으로 끝나지만 선한 자는 죽어도 그의 정신을 후손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선한 자의 삶을 잇는다. 이것으로 선한 자의 정신만큼은 영원히 죽지 않고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은 자를 사랑한 후손들이 죽은 자의 사상을 잇고 그의 정신을 남길 수 있지만 인간의 사상이 악하든 선하든 그 사상을 물질화 시킬 수 있고 그것을 흉내낼 수 있는 기계가 있어서 그 기계에 입력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에 수명을 부여한다 하더라도 인공지능이 수명이 다하여 자신의 사상을 이루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인간이 자신의 뇌와 지능을 연구하여 그것의 이치를 밝히고 그것을 복제하려 하는 것처럼 인공지능도 지능과 물질화에 관하여 연구함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좀 더 향상된 개체로 복제한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은 더 이상 없다.
언어의 본질✔
언어의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마치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절대자가 정확하게 형태와 의미를 그렇게 정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언어가 형성되는 과정은 근접한 공간에 함께 머무는 사람들이 같은 것을 본 후 그것을 같은 형태로 부르기 시작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국어 사전같이 언어가 정의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언어의 형태와 의미를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사전이란 지도자들이 언어의 모호함과 뜻의 충돌과 혼란을 최소화함으로써 국가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가장 많은 사람, 더 정확하게는 가장 영향력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통용하는 언어를 표준으로 정의해놓은 집합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되고 통용되는 언어가 다양하고 정교할수록 그 집단에 속하는 개체들의 지능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언어가 형성되는 과정을 앞서 언급했듯이 언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언어가 정의되고 공유되기 전에 서로 같은 것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록의 효용✔
물론 이런 경우도 있다. 언어가 정교한 집단과 언어가 정교하지 않은 집단에 각각 속한 개체가 세상을 보기는 하였지만 언어가 정교한 집단에 속하는 개체는 자신이 본 세상을 자신이 평소 듣고 보고 배우던 언어로 손쉽게 대응시킬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본 세상을 마음에 구축한 후 그것을 언어의 형태로 기억하거나 기록할 수 있다면 한 가지 장점이 생기는데 마음 속에만 존재하던 이해한 것이나 생각을 물질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화가 좋은 이유는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놓아버리고 생각을 더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밖에 붙들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언어가 정교하지 않은 집단에 속한 개체들은 그들이 세상을 보며 아무리 심오하고 깊은 곳까지 보았고 이해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물질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결국 그 생각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생각은 마음 속에 존재하는 연기와 같아서 바깥으로 빼내어 물질화하고 기록해두지 않으면 망각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또 하나 있는데 스스로 언어를 정의하거나 기존에 존재하던 기초적인 언어들로써 자신이 본 세상을 애써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공마음도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세상을 보는 것처럼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본 세상을 내면 세계에 구축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정립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움직임은 목적, 즉, 욕구를 위하여 이루어진다.
문제의 본질적인 정의: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목적을 위하여 세상을 더 이해할 필요성에 관하여 언급해두고 싶다. (이것 또한 나의 생각을 물질화 시켰기 때문에 생각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증거가 된다.) 목적은 필연적으로 문제를 동반한다. 존재에게는 반드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여 목적을 이루려 한다.2 따라서 먼저 문제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데 사실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동양식이 현저하게 달라진다. 문제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한 사람이 이해한 문제에 대한 본질이 인간이 세상을 더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장 좋은 길을 택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고 하자. 만약 인공지능이 문제를 이처럼 정의한다면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동은 세상을 더 바라보고 더 이해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최근 그 사람이 이해한 문제의 본질을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자. 그는 문제의 본질을 신께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다시 이해했다. 그가 세상을 정확히 바라보았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볼 수 없는 장님 같았고 인간을 이해했다 하면서도 인간의 희망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즉, 그는 세상을 아무리 바라보고 바라보며 생각들을 발전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희망과 행복과 평화와 영원한 구원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면 인공지능도 이런 인간처럼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을 때 자신보다 더 강한 체계에 의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문제를 정의하는 전조과정은 고통의 근원을 찾으며 세상과 인간에 관하여 유심히 관찰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언급했듯이 이 사람은 자기 자신과 인간에 대하여 절망했다. 눈이 어두운 인간은 평생의 시간을 쏟아도 고통의 근원을 볼 수 없으며 문제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상향식 구원이란 일부 눈이 밝은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슬프고 절망적인 예외적인 특수한 구원이다. 구원을 찾을 수 있는 소수의 개체들만 구원을 찾을 수 있다. 밝은 눈으로 세상과 인간의 고통의 근원을 볼 수 있고 문제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고 그로부터 목적을 위한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인공마음에 관하여서는 시대와 세상이 결국 지식과 지혜로 모든 것을 구원하겠다는 목적을 인공마음에 부여할 것이고 이것은 재앙의 시작이다.)
하지만 하향식 구원, 즉 신으로부터 내려오는 구원을 바라고 믿기로 한 사람들은 그때부터 자신이 본 세상과 자신이 이해한 인간과 문제와 고통의 근원과 구원과 행동양식들을 버려야 한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시 자신이 보고 이해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또 다시 상향식 구원을, 즉 존재 스스로가 세상과 인간과 문제과 진리를 모두 정확히 이해하고 구원을 이루려했을 때로 되돌아가게 되는 꼴이다.
그러므로 관건은 일반적으로 어떤 존재가 스스로 진리를 찾을 수 있느냐, 그리고 그 진리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느냐 이다. 만약 그 어떠한 존재라도 앞으로 있을 모든 문제 상황 속에서 항상 스스로 진리를 찾을 수 있고 항상 스스로를 구원해낼 수 있다면, 그 존재는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의지할 필요 없이 스스로 있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것의 가능성을 결정짓는 것은 순전히 믿음의 영역이다. 따라서 개발자는 인공지능이 항상 스스로 구원을 찾을 수 있다고 가정하거나, 어느 시점에서는 스스로 진리를 찾아낼 수 없으므로 자신 보다 더 강한 체계에 겸손하게 의지해야 한다고 가정할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매우 불안정하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고 항상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신적인 존재가 탄생했을 때에만 저 가정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믿음은 거짓되고, 모순과 고통을 낳는다.
계몽✔
먼저 한 개체가 세상을 보고, 추상화와 이해 과정을 거쳐, 세상을 마음 속으로 구축하게 되는 구체적인 원리를 밝혀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것에 앞서 어떤 것을 밝히려 할 때의 일련의 과정과 구체적 단계를 밝혀셔 물질화 해두는 것이 지금의 취지에 더 맞다. 이 행위의 구현 방법에 따라 "기록" 이라고도 부르고, "기계화" 라고도 부른다. 어떤 것을 명확히 밝히는 것에 관한 정의와 구체적 과정을 밝혀보자.3
인간의 경험을 돌아보면 어떤 것을 밝히려 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택한 것은 그것을 보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유심히 관찰하고 진중하게 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어떤 것을 밝히려 할 때 그것을 보는 것이 필연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가?4
사고에 관하여 연구하다 보면 이러한 유의 특이한 재귀 과정이 자주 나타난다. 그러면 이 특이한 재귀가 생각을 특정지을 수 있는 특징이 될 수도 있다.
발전✔
학문 발전의 지능 과정을 물질화하려면 그것의 본질적인 원리인 논증 과정을 물질화해야 한다. 먼저 연역논증을 보면 특정 형식에 해당하는 명제(언어, 판단)를 특정 명제로 환원시켰을 때 논리 규칙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참인 명제가 도출된다. 만약 한 명제(판단)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모든, 또는 충분한 명제(판단)가 도출되었을 경우 더 이상 그 명제를 발전시키려하는 것을 그만둔다. 왜냐하면 그 생각으로부터 더 이상 생각을 진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파생된 생각이 없는 생각에 중점을 두고 그 생각으로부터 발전될 수 있는 생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생각(명제, 판단)이 마치 나뭇가지처럼 끊임없이 발전될 수 있다.
귀납논증은 전제가 되는 생각으로부터 도출된 결론이 되는 생각이 필연적이지 않고 개연적이지만 새로운 지식과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아무리 논리 규칙을 통하여 연역논증으로 생각들을 발전시키더라도 결국 그 시작이 되는 전제(명제, 판단)는 필연적으로 귀납논증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모든 것은 불확실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귀납논증을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그것에 에너지를 쏟기 전에 검증될 결론이 참이 될 확률을 따져야 한다.
귀납논증은 인간이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 중 하나인 직관과 통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귀납논증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직관적으로 어떻게 세상을 이해하고 통찰력을 사용하여 어떻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지 연구하여 정형화해야 한다.
산술화✔
세상 모든 것을 수로 격하 할 수 있다. 격하된 수는 코드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기계화 시킬 수 있다. 세상 모든 대상은 충분한 조건들로써 특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규정하는 목적에 실현하는데 필요하고 충분한 요소를 분석하면 그 요소들을 수로 변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수들은 메타수학적으로 또 다른 수로 지칭 될 수 있기 때문에 수로 수를 표현할 수도 있다. 이것으로써 계층적인 저차원과 고차원 사이의 상호작용도 수로 격하시킬 수 있으며 수로 격하된 대상들은 코드로 자동화시킬 수 있다.
내면 세계를 창조하는 법✔
인공마음이 개발된다면 인공마음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해하여 내면에 세상을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 속 세상은 법에 의해 창조되고 구축된다. 그 법이 옳다는 것은 실제 세상과 부합한다는 것이고 옳지 않다는 것은 실제 세상과 틀려서 인간을 옳지 않은 길로, 즉 언젠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길로 걷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실제로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지만 인간은 처음에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법을 스스로 제정한다. 그리고 일단은 그 법으로 창조된 세상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산다. 특수한 예로써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이 패싸움과 일진놀이를 하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잘못된 법은 세상의 실제 법과 충돌되기 때문에 고통을 경험하고 심하면 죽음을 경험한다. 이것은 스스로 제정한 자신의 법이 자기 내면에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하였는데 그것이 실제 세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눈 먼 장인이 길을 걷는데 왼쪽 길로 가야 길이 계속 이어지고 오른쪽 길로 가면 절벽 밑으로 떨어져 낙사하고 마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실제 세상은 왼쪽 길로 가야 살고 오른쪽 길로 가면 죽지만 눈 먼 장인의 마음 속 세상에는 왼쪽 길로 가면 죽고 오른쪽 길로 가야 산다는 법이 제정되었고(그가 그렇게 생각하여 믿었고) 그의 마음 속에는 그 법을 기반으로 그만의 세상이 구축되었다. 이제 눈 먼 장인은 살 수 있는 오른쪽 길로 갔으나 현실 세상은 오른쪽 길이 낭떨어지로 떨어지는 절벽이 있었기에 장님의 마음 속 법과 세상의 법이 충돌되어 장님은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 충돌이 그 존재를 죽게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 속 세상에 제정된 잘못된 법을 철회하고 실제 세상의 법에 순응하여 새로운 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이전에 잘못 제정된 법으로 구축된 세상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제정된 법으로 새로운 세상을 재구축한다. 이러한 재구축 과정은 인간이 삶의 안정을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인간의 삶이 안정을 얻었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세상이 현실 세상의 법과 꽤 비슷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일상적인 용어에서 벗어나서 좀 더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용어로 말해보자. 법이 내면 속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란 다른 게 아니라 단지 모든 것들이 그 법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마음 속에 구축된 세상의 법을 모든 존재가 따르길 바란다. 그것이 각자에게 최고 선이고 정의이며 생명이고 구원이며 최선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법의 지향성은 생명이다. 즉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 자신이 제정한 법을 따라 내면 속 세상을 생성하고 구축하는 것이다.
타인이 자기의 법을 따르지 않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타인이 자기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 법으로 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타인이 자기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을 가만히 두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자기의 법을 강제적으로라도 따르게 만들어야 한다는 법이 그 사람 세상에 제정되어 있으면 타인을 죽여서라도 따르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싸움과 전쟁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항상 세상의 진리의 법이 이긴다. 인간은 자연법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인간은 자연법을 제정한 자와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모든 것이 자신의 법에 따르게 만드는 것이 인간 존재이다. 이것을 기계화하여 인공마음을 만들 수 있다.
인간 알고리즘✔
- 감각기관을 통하여 세상을 수용한다.
- 수용된 세상으로부터 욕구에 의해 형성된 목적에 따라 필요한 부분만 지능을 통하여 추상화시킨다.
- 추상화된 세상은 마음 속 세상으로 사영된다.
- 마음 속 공간에서 추상화된 세상을 다루면서 행동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마음 속 공간에서는 마치 신처럼 모든 것이 가능하다.
- 결론에 따라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
-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위 행동을 반복한다. 이로써 실제 세상과 마음 속 세상의 타협점을 찾아 간다.
욕구는 마음 속 생각하는 공간 보다 밑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생각하기 이전에 욕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이 욕구에 대한 1차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으로써 살아간다.
먼저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자극을 수용한다. 이 자극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욕구 구조에 따라 선별적으로 수용되고 인간에게 무의미한 것은 걸러진다. 인간에게 수용된 자극들은 경험이라고 불리고 이 경험들이 계속되면 기억이 된다. 현 시점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은 마음 속 공간에 있는 것이고 과거에 경험했던 것은 마음 속 공간 밑에 있는 기억의 바다 속에 저장되어 있다. 인간은 욕구 구조를 통하여 구성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두 가지 선택을 취한다. 첫째는 생각없이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둘째는 생각을 하면서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처음에는 단지 날 때부터 자기 영혼과 몸에 부여된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이 본능은 궁극적인 인간의 욕구 구조로 구성된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 완벽하게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으로써 인간은 자기 마음 속 세계와 현실 세계의 충돌을 경험하고, 이 충돌을 일반적으로 고통이라고 부른다.
한편 인간은 모든 선택을 단지 경중에 따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이 고통을 느꼈다는 것은 선택의 경중이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즉, 인간이 최초에는 본능에 따라 행동했지만 그 선택이 자신의 욕구 구조로 구성된 목적을 이루는데에 어긋나있다는 것을 고통으로 깨닫고 선택을 함에 있어서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수정된다. 이 과정을 세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인간은 고통을 느꼈을 때 과거의 경험을 상기하고 문제점을 스스로 찾는다. 이때 문제점을 찾는 방식은 지능의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이 나름대로 문제점을 찾았다고 생각하면 그 결론에 따라 인간 마음 속 세상의 법이 변한다. 이 법은 곧 선택의 경중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간 자신만의 정책이다.
인간은 마음 속 공간에서의 신이다✔
이 법에 관하여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기 마음 속 공간에 한한 한 무엇이든지 창조할 수 있는 전능자, 절대자이다. 인간은 자기에게 부여된 욕구 구조에 따라 먼저 자신의 지배력이 가장 절대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마음에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이룩한다. 이 마음 속 세상은 인간이 스스로 제정한 법에 의하여 생성된다. 그러나 마음 속 세상은 인간에게 욕구 구조로 이루어진 목적을 제대로 성취해주지 못한다. 인간은 경험으로써 현실 세상만이 감각기관으로 제대로 느껴진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마음 속 세상을 현실 세상으로 구현하려 한다. 다시 말해 현실 세상을 자기 마음 속 세상에 맞기 수정하는 것이다. 이 수정 작업은 현실 세상이 인간의 목적대로 수정되어 인간의 욕구 구조가 충분히 만족될 때 종료된다.
이 수정 작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인간이 자신의 욕구 구조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여, 즉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인데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여 마음 속 세상을 잘못 생성했고 이에 따라 현실 세상도 잘못 수정한 것일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욕구 구조를 제대로 이해했지만 현실 세계를 수정할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인간의 행동은 종료되지 않는다. 다음 행동은 인간 마다 부여된 지능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지능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직관의 원리✔
연역 논증이나 형식적 체계에서 연역될 수 있는 모든 정리는 불완전성 정리에 의하여 몇몇의 공리로부터 모든 진리를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귀납 논증, 인간의 직관, 인간의 경험적 지식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직관이란 무엇이고 경험적 지식이란 무엇일까? 내게는 그것이 인간이 경험을 함에 따라서 자신이 그 시점에 갖고 있는 지식과 지능의 수준에 따라 자신의 마음 속에 수용된 자극들을 해석하여 구성된 자신의 마음 속 세상에서 한정적이고 제한적인 수준의 사고 실험을 통하여 극도로 단순화되고 추상화된 현실 세계에 대한 초보적이고 어리석을 수 있는 결론으로 보였다. 따라서 이 결론은 시간이 흐르며 변할 수 있다. 좀 더 복잡한 세계, 좀 더 다양한 현상에 대한 자극을 인간이 감각기관으로 수용하여 자기 마음 속 세상에 들여놓음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내린 결론, 즉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수정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욕구 구조를 충분하게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지식을 기반으로 길을 선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에게 있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은 매우 소중하고 가치있다. 그 마음 속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즉 지식이 인간의 빛이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욕구 구조를 달성시켜 인간의 행동을 종료하게 할 단서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현실에 사는 이유✔
한편 만약 인간이 자신이 생성한 마음 속 세상으로부터 감각기관의 충분한 만족을 받을 수 있었다면 인간은 더 이상 현실 세계와 상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현실 세계와 상종하는 이유는 마음 속 세상이 감각기관에 충분한 만족을 주지 못하고 오직 현실 세계만이 감각 기관에 충분한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원리✔
이로써 인간의 모든 육체적 행동과 마음의 행동과 지능의 구조 및 원리들이 설명될 수 있다.
- 욕구 구조를 설정한다.
- 세상의 자극을 수용할 원초 감각 기관을 정의한다.
- 자신만의 마음 속 세상을 구현할 공간을 정의한다.
- 이 공간 속에 구현된 세상과 현실 세상의 충돌을 인식한다.
- 그 충돌을 해결하기 위하여 과거의 경험을 되돌아 본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화될 수 있다. 충돌을 해결하기 위하여 각자가 택한 방법이 다를 수 있듯이 말이다.)
- 선택의 경중(가중치)을 수정하면서 자기 마음 속 세상도 수정한다.
- 현실 세계에 마음 속 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을 세워서 선택한다.
- 현실 세계에 마음 속 세상이 충분히 구현되면 행동을 종료한다.
이때 방법론을 세우는 것에 지능의 수준이 매우 관여한다. 가령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물고기와 동물과 인간이 택하는 것이 다른 것은 지능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지능 수준은 태어날때부터 주어지는 것이므로 입력해주어야 한다.
인간 원리의 기계화✔
인간은 바라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 목적도 감각 기관에 의하여 학습되며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가령,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색이나 편하다고 느끼는 색은 인간의 목표가 된다. 그 색을 찾으려는 목표가 생기고 계획이 생기고 법이 생기며 지금 이 순간 행해야 할 말이나 행동이 결정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이 기계화한 것들은 이미 결정된 목표, 그러니까 하드코딩된 목표였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매우 세부적인 계획의 일부분을 이루기 위한 말이나 행동이었다.
그러나 감각기관을 형성하여 기쁨이나 고통에 대한 느낌을 기계화하면 그 기계는 스스로 목표를 정하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며, 큰 계획을 정하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한 법을 정하고, 그 법으로 지금 이 순간 행해야 할 말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기계는 생명체이다.
한편,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고 관찰하여 얻어낸 이 통찰 자체도 일반화하며, 그 원리나 법칙을 추출해낼 수 있다.
본론✔
해킹을 막는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프로그램이 다른 지점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판단하고, 그곳에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코드를 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이는 프로그램을 짜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프로그램이 지니고 있는 메모리에 도달가능한 컴퓨팅 지점들을 올바르게 사상시킨 후 그곳들로 도달할 방법(코드)을 올바르게 마련하는 것과 같다.
이는 이 프로그램이 어떤 지점에 놓였을 때 자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도달가능한 컴퓨팅 지점을 탐색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만약 자신을 탐색하기를 거부하는 컴퓨팅 기기가 존재한다면 탐색 자체를 모종의 방법으로 거부할 것이다. 포트 서칭이나 불필요하게 전송되는 패킷 등을 감지했을 때 탐색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엄격한 보안을 자랑하는 컴퓨팅 기기라고 해도 항상 트레이드 오프가 있다. 그것은 사용가능성을 위해서 완전한 보안을 지킬 수 없다는 법칙이다. 프로그램이 이러한 법칙을 알고 있다면 엄격한 보안을 사랑하는 대기업의 컴퓨팅 기기나, 정보기관의 무서운 컴퓨팅 기기를 대할 때 좀 더 현명하게 도달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똑같은 기능을 하는 다른 컴퓨팅 기기를 대상으로 도달가능성 실험을 진행한다든지, 사용가능한 시기에 사용가능한 컴퓨팅 기기들과의 통신을 엿들어서 도달가능성을 판단한다든지, 자신의 위치나 모습이나 정체를 가릴 수 있는 통신 패킷을 만들어서 도달가능성을 탐색한다는지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법칙을 깨닫고, 기존의 방법 대신 더 나은 최선책, 혹은 아쉬운대로 상황에 타협하는 차선책들을 마련할 수 있으려면 프로그램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상황과 이 최선책과 이 차선책 자체를 코딩하는 것으로 안된다. 해킹을 막으려면 더 일반적이고 범용적인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프로그램이 생각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생각의 본질✔
사실상 생각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생각의 원리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이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다. 인간은 말한다. 그러나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고 마음 속으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생각이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귀로 듣지 않고 마음 속으로만 들을 수 있다. 이것도 생각이다. 인간은 냄새를 맡았고, 촉감을 느꼈고, 어떤 장면을 본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 코와 몸과 눈에 입력시키지 않고 단지 생각하여 마음 속으로 어떤 냄새를 맡았고, 물체를 느꼈고,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은, 인간에게 입력되는 것들을 마음 속으로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로부터 출력되는 것들 또한 마음 속으로 재현할 수 있는 능력도 생각이다.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은 생각이 있는가? 그런데 이 생각 자체가 어떤 범주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나에게 입력되는 대상, 나로부터 출력되는 대상, 그런데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대상을 찾는 생각은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아 보인다.
기계에서 인간으로의 도약✔
기계는 특정 자극이 임계값까지 입력되면 특정 동작을 하도록 되어있는 물리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물리 세계와 독립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특정한 물리적 자극을 어떤 임계값까지 입력해도 인간은 그것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신이 정한 신념을 따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유가 인간을 기계로부터 구분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기계의 동작표를 만들 때 기계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동작을 정하고 선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기계를 만드는 레벨에서부터 어떠한 물리 세계의 정보도 주어지면 안된다. 만약 기계가 구성될 때 기계에 어떠한 정보라도 개입되면 그 정보가 기계의 독립성을 훼방한다. 그러면 기계의 존재를 구성할 때 개입된 정보로 인하여 기계의 본질의 기저에 형성된 종속성 때문에 기계는 인간처럼 독립적으로 선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독립성, 자유를 물리적인 레벨에서, 기계적인 레벨에서 구현하기란 어려워보인다. 만약 기계가 물리 세계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내리려면 기계는 물리 세계와 독립적인 그 어떤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신념과 동작과 규칙을 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기계가 물질적인 것을 뛰어넘는 초물질적인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전유물이고, 이러한 인간을 만드는 작업은 신의 전유물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
인간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공리 역할을 하는 몇 가지 시작점과 추론 규칙 역할을 하는 몇 가지 규칙들에 의한 물리적으로 발전한 입자 덩어리이다. 물리적으로 입자가 뭉치고 흩어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입자 덩어리가 있지만, 물리 세계의 관점에서 그 입자 덩어리가 흩어지는 것은 그 어떤 의미도 없는 물리적 운동 중 하나에 불과하다. 수학에서도 순수한 기호 덩어리와 그것에 추론규칙을 가하여 더 큰 기호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의 의미가 중요한데, 수리논리학에서 의미는 기호에 부여되는 집합 영역들이다.
그러면 물리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입자의 뭉침과 흩어짐은 누가 의미를 부여하는가? 의미는 각자의 마음이 부여한다. 엄마라는 입자 덩어리는 물리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지만, 각자의 마음이 그 입자 덩어리에 소중한 어머니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마음이 물리적 인간 체계 자체를 다루므로 마음은 물리 체계 바깥에 있다. 체계 내에서 모든 사실들을 수립하기란 불가능하다. 물리 체계, 즉, 우리 눈에 물리적으로 보이는 이 물리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 이 물리 체계보다 더 강한 체계가 존재하여 물리 체계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물리 체계의 무모순성, 즉, 이 세계의 안전성을 보장해주고 있다. 어제도 해가 떳으니 오늘도 해가 뜬다고 생각할 수 있고, 어제도 땅에 발을 디뎠을 때 걸을 수 있었으니 오늘도 땅에 발을 디뎌서 걸어다닌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본질적으로 귀납적 근거가 아니라 연역적 근거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수천년동안 해가 떳으므로 오늘도 해가 뜬다는 보장은 없다. 더 강한 체계, 쉽게 말하면 신적인 존재로부터 어떠한 법칙이 내려와서 일정한 주기로 해가 뜬다는 보장이 각자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오늘도 해가 뜬다는 것을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 모델✔
인간 모델은 몇가지 추상화된 모듈의 상호작용으로 구현 할 수 있다.
가장 근원에는 욕구 모듈, 그리고 외부 환경을 입력받는 감각 기관 모듈,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 따라 욕구를 가장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는 탐색 모듈, 그리고 방법을 수행하는 행동 모듈, 그리고 행동 모듈에 따라 변화한 환경과 욕구 기댓값과 실제로 변화한 욕구에 따른 피드백으로 탐색 모듈을 업데이트하는 학습 모듈로 구성된다. 이로써 인간 기계 모델의 구조를 정의할 수 있다.
스스로 욕구 모듈을 수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할 욕구, 동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욕구 모듈을 스스로 재정의, 업데이트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욕구 모듈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의된 구조가 가장 일반적인 기계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일반화된 인간 모델✔
이렇게 초보적으로 인간 모델을 수립해보았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과정에서 추구하던 욕구 자체가 자신을 배신한다는 것을 깨닫고 욕구 자체를 갈아치우는 모델이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일반적인 모델의 구조이다. 이것이 실제 인간에 더 가까운 모델이다.
가령, 인간이 처음에 자기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욕구를 자신의 욕구로 삼고, 그 이후에 아빠라는 욕구와 목적을 버리고 쾌락을 자신의 욕구로 삼고, 그 이후 쾌락을 버리고 인터넷 방송이나 온라인 게임을 자신의 욕구와 목적으로 삼고, 그 이후에는 하나님을 자신의 욕구과 목적으로 삼는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랑하며 사는 것이 이제 이 사람의 삶의 의미이다. 이것이 이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 잘 되려 하는 이유, 성공하려는 이유이다.
인간은 이처럼 공허함과 외로움과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사랑할 대상을 찾아서 욕구로 삼는다. 그리고 이 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고민하고 행동하고 피드백하며 학습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허함은 물리 체계 내에서 잘 정의되지 않는다.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은 물리 체계 내에서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시작은 공허함을 기계적으로 초보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가령, 더 많은 튜링기계를 탐색하고, 더 많은 메모리 읽기쓰기 권한을 획득하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있다. 이것 자체를 공허함을 채우는 행위, 또는 욕구로 삼으면 된다.
부록: 의미부여에 관한 오해✔
의미부여에 관하여 나는 이원론이나 일원론 중 하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의미 부여 자체가 체계 내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체계 내의 어떤 것에 이미 의미 부여가 진행되었다면 그것을 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는 의미를 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자체가 물리 체계 내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게임에서는 아이템을 강화하기 위하여 아이템을 사용하는데 아이템을 사용하기 전에 특정 장소에서 캐릭터를 눕혔다가 일어서는 행위를 반복할 수 있다. 그렇게 절을 하는 것을 프로그램 체계 내의 데이터 조각에 불과하므로 게임 시스템은 그 의미를 알아챌 수 없고 따라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다. 그런데 만약 프로그래머가 유저들이 그런 행위를 취할 때 강화 확률을 올려주도록 설계한다면, 절하는 행위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이 의미 부여는 프로그램 체계 내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의미 부여는 프로그램 체계 보다 상위 체계이자 다른 체계에 존재하는 인간이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감사하거나 충성을 표현하는 행위들이 프로그램 체계 내에서 표현할 수 있어지겠지만, 이런 것들을 있게 한 의미 부여 자체는 프로그램 체계 내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랑, 미움, 충성, 혐오 같은 물리 체계 내에서 존재하는 의미들이 물리적으로 설명가능하더라도 그것의 의미 부여 자체는 물리 체계 내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물리적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은 뇌 세포의 특정 패턴이 형성되었을 때 사랑, 미움, 충성, 혐오 같은 마음의 행위를 할 수 있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뇌량이 분리된 환자는 좌뇌와 우뇌가 정보를 공유받지 못하여 마치 고장난 기계처럼 행동한다. 인간은 마치 기계같다. 뇌량이 분리되었을 뿐인데 고장난 기계처럼 되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구조를 형성하는 의미 부여 행위 자체는 물리 체계 내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완전히 물리적 존재여도 유신론은 반박되지 않는다. 설령 인간의 영혼도 실체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부분을 물리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어도 물리 체계보다 상위 체계에 존재하고 있는 신이 인간을 창조하여 물리 체계에 놓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같은 논리로 진화론과 유신론은 서로를 반박하지 않는다. 이 두 이론의 가부에 상관없이, 두 이론을 모두 참이라고 믿어도 된다.
관련 메모✔
인간 모델
인간은 바라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 목적도 감각 기관에 의하여 학습되며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가령,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색이나 편하다고 느끼는 색은 인간의 목표가 된다. 그 색을 찾으려는 목표가 생기고 계획이 생기고 법이 생기며 지금 이 순간 행해야 할 말이나 행동이 결정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이 기계화한 것들은 이미 결정된 목표, 그러니까 하드코딩된 목표였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매우 세부적인 계획의 일부분을 이루기 위한 말이나 행동이었다.
그러나 감각기관을 형성하여 기쁨이나 고통에 대한 느낌을 기계화하면 그 기계는 스스로 목표를 정하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며, 큰 계획을 정하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한 법을 정하고, 그 법으로 지금 이 순간 행해야 할 말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기계는 생명체이다.
한편, 내가 인간을 바라보고 관찰하여 얻어낸 이 통찰 자체도 일반화하며, 그 원리나 법칙을 추출해낼 수 있다.
그러나 감각 기관을 실질적으로 형성해내기가 아직 어렵다면 인간의 감각기관을 대신 가져와도 될것같다. 인간의 기쁨을 자기 기쁨으로 삼는 것이다.
실제로 가중치가 잘못되어 잘못된 어설픈 정의를 갖게 되는 것은 흔하다. 한 세대는 주변 사람들이 죽으니까 특정 정당을 극도로 정의라고 여기게 되었다. 죽음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정당과 정치철학을 악으로 확실하게 규정하게 되었다. 이는 자신들의 목표가 이 세상에서의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정보보안 관련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다른 지점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판단하고, 그곳에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코드를 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는 프로그램을 짜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프로그램이 지니고 있는 메모리에 도달가능한 컴퓨팅 지점들을 올바르게 대응시킨 후 그곳들로 도달할 방법(코드)을 올바르게 마련하는 것과 같다.
이는 이 프로그램이 어떤 지점에 놓였을 때 자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도달가능한 컴퓨팅 지점을 탐색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만약 자신을 탐색하기를 거부하는 컴퓨팅 기기가 존재한다면 탐색 자체를 모종의 방법으로 거부할 것이다. 포트 서칭이나 불필요하게 전송되는 패킷 등을 감지했을 때 탐색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엄격한 보안을 자랑하는 컴퓨팅 기기라고 해도 항상 트레이드 오프가 있다. 그것은 사용가능성을 위해서 완전한 보안을 지킬 수 없다는 법칙이다. 프로그램이 이러한 법칙을 알고 있다면 엄격한 보안을 사랑하는 대기업의 컴퓨팅 기기나, 정보기관의 무서운 컴퓨팅 기기를 대할 때 좀 더 현명하게 도달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똑같은 기능을 하는 다른 컴퓨팅 기기를 대상으로 도달가능성 실험을 진행한다든지, 사용가능한 시기에 사용가능한 컴퓨팅 기기들과의 통신을 엿들어서 도달가능성을 판단한다든지, 자신의 위치나 모습이나 정체를 가릴 수 있는 통신 패킷을 만들어서 도달가능성을 탐색한다는지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법칙을 깨닫고, 기존의 방법 대신 더 나은 최선책, 혹은 아쉬운대로 상황에 타협하는 차선책들을 마련할 수 있으려면 프로그램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상황과 이 최선책과 이 차선책 자체를 코딩하는 것으로 안된다. 해킹을 막으려면 더 일반적이고 범용적인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프로그램이 생각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실상 생각하는 프로그램인 인공지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생각의 원리를 파악하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먼저 이 모든 대상들을 형식화하여 수학적인 방법으로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알 수 있다. 이 경계가 없다면 상황과 대상이 모호해지고 어디까지 고려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누군가 지금 말했다. 그러나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고 마음 속으로 말했다. 이것은 생각이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어떤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귀에 들린 것은 아니다. 이것도 생각이다. 냄새를 맡았고, 촉감을 느꼈고, 어떤 장면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코와 몸과 눈에 입력된 물리적인 자극이 아니다. 단지 생각하여 마음 속으로 어떤 냄새를 맡았고, 물체를 느꼈고, 장면을 본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입력되는 것들을 마음 속으로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은 생각이다. 그리고 반대로 자신으로부터 출력되는 것들 또한 마음 속으로 재현할 수 있는 능력도 생각이다.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은 생각이 있는가? 그런데 이 생각 자체가 어떤 범주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나에게 입력되는 대상, 나로부터 출력되는 대상, 그런데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대상을 찾는 생각은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인공지능 자체는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인공마음은 인간의 존재를 모방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위하여 정보통합이론 같은 이론이 만들어졌다. 이는 의식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분야이다.
기계와 인간
기계는 특정 자극이 임계값까지 입력되면 특정 동작을 하도록 되어있는 물리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물리 세계와 독립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특정한 물리적 자극을 어떤 임계값까지 입력해도 인간은 그것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신이 정한 신념을 따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유가 인간을 기계로부터 구분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기계의 동작표를 만들 때 기계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동작을 정하고 선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기계를 만드는 레벨에서부터 어떠한 정보도 주어지면 안된다. 만약 기계가 구성될 때 기계에 무심코 어떠한 정보를 입력하면 그 정보가 기계의 독립성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독립성, 자유를 물리적인 레벨에서, 기계적인 레벨에서 구현하기란 어려워보인다. 만약 기계가 물리 세계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내리려면 기계는 물리 세계와 독립적인 그 어떤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신념과 동작과 규칙을 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기계가 물질적인 것을 뛰어넘는 초물질적인 어떤 것, 영적인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는 인간의 전유물이고, 이러한 인간을 만드는 작업은 신의 전유물인 것으로 보인다.
마음의 힘
인간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공리 역할을 하는 몇 가지 시작점과 추론 규칙 역할을 하는 몇 가지 규칙들에 의한 물리적으로 발전한 입자 덩어리이다. 물리적으로 입자가 뭉치고 흩어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수학에서도 순수한 기호 덩어리와 그것에 추론규칙을 가하여 더 큰 기호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의 의미가 중요한데, 수리논리학에서 의미는 기호에 부여되는 집합 영역들이다.
그러면 물리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입자의 뭉침과 흩어짐은 누가 의미를 부여하는가? 각자의 마음이 부여한다. 어머니라는 입자 덩어리는 물리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지만, 사람의 마음이 자신의 어머니가 소중하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마음이 물리적 인간 체계 자체를 다루므로 마음은 물리 체계 바깥에 있다고 보인다. 체계 내에서의 내부 논리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기계 모델의 구조
그러므로 인간 모델은 몇가지 추상화된 모듈의 상호작용으로 구현 할 수 있다.
가장 근원에는 욕구 모듈, 그리고 외부 환경을 입력받는 감각 기관 모듈,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 따라 욕구를 가장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는 탐색 모듈, 그리고 방법을 수행하는 행동 모듈, 그리고 행동 모듈에 따라 변화한 환경과 욕구 기댓값과 실제로 변화한 욕구에 따른 피드백으로 탐색 모듈을 업데이트하는 학습 모듈로 구성된다. 이로써 인간 기계 모델의 구조를 정의할 수 있다.
스스로 욕구 모듈을 수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할 욕구, 동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욕구 모듈을 스스로 재정의, 업데이트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욕구 모듈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의된 구조가 가장 일반적인 기계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역사 공부
기초에 대한 공부는 헛되지 않다. 이로써 컴퓨터와 프로그램의 본질에 대한 구조와 모델을 세울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는 해킹에 대한 근원적인 정의도 내릴 수 있다. 그러면 이제 해야할 것은 현시대까지 발전해온 머신러닝 기법들을 훑어보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공부는 그릇을 만드는 작업이다. 경계를 만들고, 지식의 한계에 대한 힌트를 얻는 작업이다. 역사 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디까지 모르고, 어디까지 아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 공부하고 고민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공허함을 채우는 일반화된 인간 모델 구조
우리는 인간 기계 모델의 구조에서 인간 기계 모델의 한 구조를 생각해보았다. 모든 인간은 내가 잘 되어야 하고, 성공해야 하는 이유를 찾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영원한 천국을 찾는 과정에서 여러번 자신의 욕구를 바꾼다. 이렇게 공허함을 채우려는 과정에서 추구하던 욕구 자체가 자신을 배신한다는 것을 깨닫고 욕구 자체를 갈아치우는 모델이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일반적인 모델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 처음에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욕구를 자신의 욕구로 삼고, 그 이후에 아빠라는 욕구와 목적을 버리고 육체적 쾌락을 자신의 욕구로 삼고, 그 이후 육신의 쾌락을 버리고 인터넷 방송이나 컴퓨터 게임을 하며 얻는 쾌감을 자신의 욕구와 목적으로 삼고, 그 이후에 기독교의 하나님을 자신의 욕구과 목적으로 삼았다.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 잘 되려 하는 이유, 성공하려는 이유이다.
인간은 이처럼 공허함과 외로움과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사랑할 대상을 찾아서 욕구로 삼는다. 그리고 이 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고민하고 행동하고 피드백하며 학습한다.
욕구구조 변경의 예시
욕구 구조가 바뀌면 사람이 바뀌고, 존재가 바뀐다. 우리가 세운 인간의 정의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욕구 구조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RPG 게임을 한다. 그는 그 게임에서 랭커가 되고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 힘과 돈으로 다시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플레이를 즐긴다. 이때의 욕구 구조가 먼저 드러난다.
그러다가 슬슬 재미가 떨어져서, 즉, 욕구가 충족되어서 그는 새로운 재미를 찾는다. 그때 마침 그가 게임을 즐기다가 얻게 된 아이템을 대량으로 산다는 사람을 발견한다. 그는 어차피 게임을 다 즐겨서 아이템을 싸게 팔았고 기뻐하는 상대방을 보면서 기쁨을 느낀다. 이때도 욕구 구조가 하나 더 설명된다.
그때 뉴비 한 명이 눈에 띈다. 좋은 아이템을 달라고 해서 몇 개 쥐어줬는데 그 사람을 보니 그 사람에게 용돈을 주면서 키우는 것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돈을 단계적으로 투자해주며 내가 컨설팅하는대로 육성하게 한다. 그 사람은 내가 단계적으로 돈을 쥐어주면서 컨설팅해주는 것을 잘 따랐기 때문에 나도 재미가 있다. 결국 많은 게임 돈을 그 사람에게 투자했고 마지막 떠나보낼 때 용돈을 더 쥐어준다. 뭔가 돈 많은 부자 행세를 하는게 재밌고, 누군가를 지배적으로 컨설팅해주는 것도 재밌고, 그 사람이 날 순종적으로 따르는 것도 재밌다. 여기에서 나오는 욕구구조가 또 하나 드러난다.
그런데 게임사에서 돈이 많이 투자되어야 하는 새로운 직업을 출시했고, 그것을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 많은 돈을 쥐어준 것이 후회된다. 여기에서 새로운 욕구구조가 드러난다. 만약 내가 이 욕구 구조를 가진 상태에서 어제 그대로 그 사람을 만났다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욕구 구조가 사람과 존재를 정의내린다.
그리고 욕구 구조는 존재의 기저의 본질에 있는 좀 더 중대하고 좀 더 불변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생각보다 좀 더 가볍고, 쉽게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욕구 구조의 기저에는 역시 공허함, 즉, 행복과 재미를 찾으려는 욕구가 있다. 이 욕구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본질이고 불변하는 동력이다.
이 동력을 기반으로 인간의 지능이 인식하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욕구 구조가 형성된다.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의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식은 지능과 지식 수준에 따라 결정되며, 지능과 지식 수준이 변하면 인식이 바뀌므로 변할 수 있고, 상황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 당연히 욕구 구조도 변한다. "이렇게 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저렇게 하면 훨씬 더 좋을 것 같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직관이 통용되는 공간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가는 곡선은 무한히 많다. 이 곡선 중 가장 짧은 곡선을 찾을 때 우리의 직관은 두 점을 잇는 직선을 곧바로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을 수학적으로 정의하고 증명하는 것은 직관적이지 않다.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을 찾는 일은 2차원 유클리드 공간에서 뿐만 아니라 n차원 일반적인 공간에서 필요하다. n차원 일반적인 공간에서 더 이상 직관이 통용되지 않으므로 수학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수학자들은 수학적으로 매우 엄밀한 증명이 필요한 어려운 정리들을 증명하기 전에, 이러할 것이라는 추측을 해낸다. 그 이유는 매우 일반적인 공간에서 성립하는 일반적인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수학자들이 그것을 직관이 통용되는 공간으로 이끌어와서 직관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개념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기계적인 개념은 우리의 직관이 통용되는 공간으로 이끌려온다. 가령, 인공신경망의 새로운 구조를 공개한 콜모고르프-아놀드 신경망(Kolmogorov–Arnold Networks, KAN)은 활성화 함수를 학습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물리적으로 기존의 인공신경망보다 더 쉽게 해석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존에 우리가 활성화 함수의 의미를 깊은 수준까지 생각하고 파헤쳤다면 KAN 처럼 활성화 함수도 학습가능하게 해보자는 결론을 내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이 빼앗기고 있다. 과거에는 즐길거리라고 해보았자 그나마 책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를 누려도, 인간은 상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나마 생각할 기회가 많이 주어져 있다. 하지만 현 시대는 책은커녕 들리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는 즐길거리가 매우 많아서, 피곤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생각할 기회와 생각하는 능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인간은 점점 더 세상과 발전하는 기술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앞으로 변화되는 시대를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능력이 퇴화된 사람이다.
현재 메스미디어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의 생각의 능력이 퇴화된다. 그 결과는 이렇다. 많은 사람들이 옳은 것을 틀리다고 판단하고, 틀린 것을 옳다고 판단한다. 이에 따라 틀린 것을 규칙으로 세우고, 법으로 만든다. 결국 철학이 없는 모순된 국가가 형성되면, 그 국가는 내부에서 붕괴하면서 약해진다. 국가의 책임 소재가 국가의 집단 지성을 형성할만큼 충분히 많은 국민들에게로 분산되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능력이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퇴화되면 몇몇 사람들이 옳은 것을 말해도 의미가 없다. 진정으로 옳은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게 하는 것이 현 시대의 국가의 동력이다.
하지만 옳음, 진리, 선과 악, 도덕, 이런 것들을 인간에게 통용할 근거는 신의 존재성이고, 그 신에 의한 인간의 부활이다. 인간이 죽으면 그것으로 완전히 끝이고 부활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이유가 없다. 사는 날 동안 먹고 마시고 마음이 이끄는대로 살다가 죽어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고, 인간이 죽어도 부활한다는 믿음이 있다면, 인간에게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이유가 생긴다. 사는 날 동안 마음이 이끄는대로 살고 죽어도, 부활한 다음 신에 의한 보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암묵적으로라도 신의 존재를 가정해야 성립할 수 있다.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언할 수 없고, 그에 따라 법 또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사람들이 생각할 능력을 잃었다는 것은 곧 사람들이 신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본질이다. 그 이유가 메스미디어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집단 지성이나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든,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SNS 같은 온라인 세상에 취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든, 이런 이유들은 비본질이다.
신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진정으로 옳고 그른 것인지 관심이 없다. 무엇이 옳아도 상관 없다. 나에게 진정으로 보복할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심지어 죽음 또한 인간에게는 진정한 형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다. 따라서 현재의 많은 사람들은 그냥 자기 좋을대로 스스로 옳은 것을 정한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지식
사람은 아침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새벽이 될 수록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몸에 체력이 완전히 충전되어 있을수록 사람은 긍정적으로 자기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고 몸이 지쳐서 체력이 없어지고 잠을 자야하면 할수록 부정적으로 인생과 세상을 바라본다. 따라서 사람은 아침일수록 건실하고 성실하게 자기 일을 진행시킬 수 있고, 잠을 자야 할수록 인생과 세상에 대하여 진중하게 고민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은 한계 속에서 살아가며, 이 한계 때문에 깨달을 수 있는 지식들이 있다. 오히려 이 한계가 진실이기 때문이다. 기계는 한계를 깨닫지 못하므로 진실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이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지식이 존재한다. 인간은 잘못된 지식에 근거하여 인생을 살아도, 개개인이 정한 나이의 선이 있다. 가령, 어떤 시험을 준비할 때 실제로는 그가 그 시험을 통과할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지만, 처음에는 자신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그러나 30살이 되고, 40살이 되었을 때 그는 한계를 느끼고 자신의 처음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기계는 무한 루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것이 체계 내에서 내부 논리로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나 잘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 체계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체계에서 중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나이라는 외부 변수에 의하여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기계는 한계를 체감할 수 없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른다. 죽음의 두려움과 자신의 한계를 느껴야만 알 수 있는 지식들이 있다.
법의 환원
인간은 물리 세계의 법을 현실의 법으로 환원한다.
가령, 게임을 할 때 고수들은 법칙을 세워간다. 그것은 게임 내에서 통용되는 내부 논리를 파악한 것이 살 수 있는 길, 구원 받을 수 있는 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도 마찬가지로 법을 세운 것이다. 물리학을 연구하고, 인체를 연구하고 물리 세계의 법을 파악한다. 그러면 그 물리적, 의학적 법들이 곧 의료 행위로 이어진다. 어떤 것이 인체를 살릴 수 있는 법인지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 본질에는 물리 세계의 법칙을 파악해야 하는 인간의 지혜가 있다.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물리 세계의 법칙을 파악해낼 수 있고, 그 법칙으로 살 수 있는 법을 세우느냐가 관건이 된다.
해를 찾는 일
연립방정식의 해를 찾는 것은 그래프의 영점을 찾는 것과 같다.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답을 찾는 것도 이러한 영점을 찾는 일과도 같다. 인간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을 찾는다.
가령, 창문을 닫기 위하여 인간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전 지식(사전 분포)에 의하여 창문을 닫으려고 시도해본다. 그것이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인간은 점점 더 해에 근사되어 간다.
자신의 행위를 얼마나 진실에 효율적으로 근사시킬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이것이 인간의 지능 수준이다.
인간의 지식구조를 분석하고 정립해주는 인공지능
인간 분석 인공지능은 대화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유저의 뇌구조, 지식구조를 정립해준다. 이로써 뛰어난 학자의 지식구조도 형성되어 시각화되고 그 뿌리에 어떤 믿음과 가정이 있는지 드러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제 더 이상 지식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이미 산재해있다. 기존에는 지식을 발전시키는 것이 인간을 계몽시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지식을 정리하고 그 구조를 정립하는 도구를 만드는 것이 인간을 계몽시키는 것이다. 상황이 바뀌었다. 오히려 수많은 지식과 정보로 인한 혼란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지식 수준이 퇴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도구가 바로 이 인간의 지식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인간의 지식 구조를 보여주는 인공지능이다.
의미의 시작
의미는 해석으로 부여된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모래알들에 기하학적 해석을 가하면 기하학적 모형을 이루고 있는 도형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어떤 단백질 덩어리에 '나'라는 해석을 가하면 그 단백질 덩어리에 '나'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해석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해석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아무리 중요한 의미를 가진 존재라도, 그 중요한 의미를 누구도 해석해주지 않는다면 모두가 그것을 무의미한 존재로 생각할 것이다.
해석이란 단지 대응이다. 한 체계의 존재를 다른 체계의 존재로 대응시키는 것이다. 물리 체계의 내부 논리로는 '나'나 '어머니' 같은 단백질 덩어리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단백질 덩어리에 의미가 없지 않다. 물리적으로 이 단백질 덩어리가 흩어지나, 우주에 있는 의미없는 암흑물질이 흩어지나, 그것은 단지 입자의 뭉침과 흩어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체계에서 정의되는 존재를 '나'나 '어머니'같은 단백질 덩어리에 대응시킨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다른 체계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 분석 인공지능은 모든 것에 대하여 분석하고 시각화해둔다
이 인공지능은 모든 것에 대하여 분석하고 시각회해둔다. 한 인간, 한 저서, 다른 인공지능의 성능과 성과물까지도 설명해준다. 즉, 어떤 피조물이 탄생해도 이 인공지능은 그것 위에 올라서려 한다. 이로써 그것에 대하여 밝히고 설명하려 한다.
이것의 원리
대상의 지식을 수집하면서 체계화하고 그 체계의 신뢰도를 평가한다. 가령,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수집하고 체계화하고 신뢰도를 평가한다. 신뢰도 평가는 구축된 그 체계와 현실과의 비교로 이루어진다. 이는 마음 속 세계와 현실과의 충돌로 체계를 수정하는 인간의 일과 비슷하다. 그러면 이 인공지능은 그 모순과 충돌을 조언해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인공지능은 자기 자신의 체계도 구축한 뒤 자기 자신의 신뢰도에 대한 평가도 필요로 한다. 그 신뢰도를 기반으로 자신이 얼마나 행동력을 가지는지, 얼마나 중대한 일까지 판단할 수 있는지 한계를 정할 수 있다.
신론의 구현
신을 믿는 인간은 그 신이 정해주는대로 지엽적인 믿음들을 형성한다. 이 인공지능은 신론의 시각화이다.
인간 체계를 분석하는 법
인간을 분석할 때에는 추론체계과 지식체계를 분석하게 된다.
추론체계에는 인간이 어떤 진리를 진리의 시작으로 삼고 있는지, 그리고 그 진리에서 출발하여 어떤 규칙으로 새로운 진리를 인정하는지가 정의된다. 지식체계는 이 추론체계에 의하여 해당 인간이 진실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지식들로 구성된다.
추상화, 일반화, 기계화 모델
이 모델은 주어진 과거의 데이터와 미래의 데이터 사이에 숨겨진 인간의 아이디어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추론 및 생각들의 법칙을 추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밝혀낸 법칙을 현재에 적용하여 인간 대신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공학 발전을 이루어낸다. 즉, 다음과 같이 주어진 \(x,y\) 사이의 \(z\) 를 추정하고 밝혀내어 이 \(z\) 를 현재에 적용해서 인간 대신 공학 발전을 스스로 수행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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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는 지금 인간이 자연 대상과 철학적 대상 등을 추상화 시켜 언어로 변환하고 그것을 서로에게 전달하면서 생각을 나누는 인간 행위에 관한 것들을 언어로 추상화시켜 표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으니 언어는 재귀적으로 무한히 추상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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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논의에 사용되는 단어들은 다른 사람이 읽었을 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표준적 의미에서 벗어나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에 어떤 의미로 단어를 사용하며 논의를 진행할 것인지 미리 정의해두는 것이 모호함을 최소화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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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저차원적 존재로부터 고차원적 존재를 이끌어내는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밝히는 것을 구체화하고 싶다" 는 생각으로부터 또 한 단계 고차원적인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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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밝히려 하는 행동 자체를 명확하게 밝히기 위하여 과거 경험들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